*트리거 워닝. 피, 죽음, 사고, 욕설
*본문에 나오는 지명, 회사명, 운세는 사실이 아닙니다.
나의 별 B와 Y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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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서울이랍시고 밤 열 시가 무색하게 언덕배기 아래로 불빛들이 눈 시리게 번쩍거렸다. 누우런 가로등과 멀리 보일락 말락 한 붉은 점 따위가 잔상을 빚어냈고 도시에 빛을 빼앗긴 희미한 달이 붉은 빌라 꼭대기를 비췄다. 어스름한 골목길에 차가운 바람이 살을 파고들었다. 한 것도 없는데 십일월이라고 반소매를 입고 나오면 추운 감이 들었다. 주민 여덟 명도 채 안 되는 달동네. 그 중에도 이십 대는 꼴랑 두 명이었다. 김민규와 전원우. 둘은 난방도 잘 안 되는 빌라 일 층 차가운 방바닥에 나란히 앉아 몸을 기대었다. 형, 저어기 밤하늘 좀 봐. 아무것도 없어. 하다못해 별이라도. 진짜 까맣기만 해. 김민규가 방충망으로 막힌 밤하늘을 바라다보다 중얼거렸다. 반사되는 가로등 불빛에 날파리가 모여들자 그는 이내 창을 닫았다. 그들은 또 뻔한 하루를 마무리 짓기 위해 타자기를 두들겼다.
피묻은클리셰
메리 배드 엔딩.
전원우는 소설가였다. 이따금 시대를 앞서간 기괴한 동화를 내놓기도 했지만 그의 입을 빌리자면 소설가라 부르는 것이 옳았다. 대중에게 스포트라이트도 못 받고 평론가에게는 혹평밖에 들어본 적 없는. 그의 타이틀은 '고졸 괴짜 작가' 였다. 왜 고졸이라는 학력까지 타이틀에 욱여넣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기억했다. 전원우는 애초에 그런 수군거림에 돌아볼 틈이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무감했다는 뜻이다. 이따금 신작 출간일에 '고졸 괴짜 신인 작가, 이번에는 어떤 충격을?' 따위의 타이틀이 달린 기사가 올라오기도 했다. 그런 것도 광고라고.
꽤나 허접한 수식어가 붙는 작가 전원우는 스물 네 살 때, 청년 작가 발굴을 위한 어느 대기업의 산문 대회를 통해 작가로 등단하게 되었는데 -처음에 그는 상금이 목적이었다.- 데뷔작 악의 서사는 그의 소설 중 가장 무난한 작으로 뽑힌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더 많은 소설집을 출판하려 했지만 정작 출판에 성공한 책은 몇 되지 않았다. 원고에서는 활자만으로 공포스러운 배경이 눈에 선했고 금방이라도 주변으로 튀어 살갗에 차갑게 닿을 것 같은 핏방울이 느껴졌다. 이번 신작은 더욱 그랬다. 제목에서부터 피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함으로써 공포감을 극대화했다. 자연히 출판사는 그의 원고를 꺼렸다. 이미 피 냄새가 진동하는 소설의 유행은 지난 지 오래지만 전원우는 계속 이를 고집했다. 그러던 중 간신히 찾은 출판사가 '제이의숲' 이었다. 출판사 이름 참 구린데 그걸 또 김민규가 지었댄다. 꼭 칠 년 만의 연락이었다.
김민규는 꽤나 전원우의 뒤를 캐고 다닌 듯했다. 그가 느끼기엔. 김민규 말로는 원고의 문장만으로 금방 전원우의 글임을 알았다는데, 문체가 유난히 독특하여 관심을 끈 것도 아니며 대한민국에 전원우가 한둘인가?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시간 상 원고를 확인하자 마자 연락을 준 모양이었다. 충동적이고 사람을 쉽게 잊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물론 전원우 자신도 김민규를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과 문체만 보고 덜컥 전화를 거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이제 뭐 어떻게 하려고.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전원우는 순간적으로 휴대전화의 붉은색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열여섯의 겨울부터 열여덟의 여름을 책임졌던. 그러니까 온 고등학교 생활을 관장했던 목소리. 아직도 전원우 속에서는 넥타이를 풀고 손가락에 걸어 빙빙 돌리며 제 이름을 부르던 열일곱의 김민규가 살았다. 학주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대충 덮은 검은 머리 사이로 노오란 염색모가 보이는 김민규가 하루에도 수백 번 원우형을 외쳐 댔다. 이렇게 짙게 남은 향수를 스물넷이 와서 뭐 어쩌겠다고.
그가 생각해도 이기적이었다. 누가? 전원우와 김민규 둘 다. 자퇴 후 번호를 알면서도 연락 한번 없었던 전원우나, 그의 이름에 숨이 꽉 막혀서는 헛기침이나 해대며 전화했던 김민규나. 멀끔히 차려 입은 김민규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카페 문 앞에서 종소리가 잠깐 났다. 알바생은 여느 손님에게 그랬듯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었고 김민규는 그 인사를 받다가 전원우를 발견하고는 말을 멈추었다. 칠 년 만의 만남. 전원우 인생사 완만하게 흘러가나 했던 그래프가 확 꺾였다. 급전개였다. 그래프가 정점을 찍어 심장 박동이 제대로 일을 안 하던 날. 꼭 시월 이십 일의 일이었다. 김민규가 전원우 앞에 앉아서는 의자를 앞으로 조금 끌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가져온 원고를 몇 장 넘기더니 이내 자켓 주머니에서 명함을 내밀어 전원우 앞에 조용히 놓았다.
"김민귭니다."
안다, 씨발놈아. 나보다 한 살 적은 사월 육 일생. 별자리는 양자리에 유난히 타로와 운세를 잘 믿던 착한 양아치 김민규. 어쩌면 그에 대해 김민규 그보다 전원우가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처음 만나는 것처럼 이름 소개부터 시작해야 한다니.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왔다.
"전원우입니다."
상황상 처음 뵙겠습니다 와 같은 인사는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나는 것처럼 굴지만 처음 만나는 건 아니니까. 김민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전원우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한 공기만이 둘을 감쌌고 주변 사람들의 소곤거림이 작게 일었다. 참 눈동자 하나 까맣다. 이 말 교복입고도 했던 것 같은데. 꼭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 것 같이 생겼다였나?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그런 뉘앙스였다. 그렇게 빤히 보기만 할 때 김민규가 항상 하는 말이 있었는데.
"형 뭘 그렇게 봐요. 내 눈이 그렇게 깊고 까매요?"
눈동자만을 응시하다 동시에 움직이는 김민규의 입으로 눈길을 옮겼다. 방금 말했던 게 열일곱의 김민규였나 스물넷의 김민규였나. 전원우는 전자에 표를 걸었지만 후자가 맞았다. 형식상으로는 오늘 처음 본 게 맞는데. 이름부터 소개하고 명함까지 받았는데. 스물넷의 김민규는 스물다섯의 전원우를 형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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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미팅은 흐지부지 끝났다. 꼭 출판해주겠다는 약속을 말로 받아 내긴 했으나 계약은커녕 일반적으로 출판사에서 주는 질문 같은 것도 없었다. 동정과 사심 사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편집장이 김민규였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또 다른 점 한 개 더, 김민규가 초조해했다. 천하의 김민규가? 퇴근하는 담임 등 뒤에서 피우던 담배꽁초를 땅에 버려 신발로 비비고는 옅은 미소와 함께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하고 인사나 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않던 김민규가, 초조해한다. 그것도 존나.
미팅 내내 그는 이따금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고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을 뒤적거리기도 했다. 또 뭐 흘렸나, 여전하네. 그것으로 생각을 끝냈다. 머리가 아팠다. 환절기라기엔 가을의 중턱이었고 전날 잠도 부족하지 않았다. 역시나 김민규가 화근이었다. 어떻게 갑자기 와서는 온갖 계획을 흐트러놓고 갈 수가 있는가? 출판까지 남은 과정도 한가득인데 그 때까지 줄곧 그와 연락과 만남을 반복해야 할 게 분명했다. 연락처에 "김 편집장" 이라는 번호가 추가되었고 이제 민규야, 보다 편집장님이라 불러야 했다. 그렇다면 그는? 정작 김 편집장은 전원우를 형이라 불렀다. 그 충동적인 눈동자 발언 이후로 주욱. 남은 미팅 두 시간동안 그랬고, 미팅이 끝나고 문자메시지로 연락을 줄 때에도 그랬다. 그놈의 형 소리 좀 그 입에서 안 나오게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그는 형이라 부르는데 너무 혼자 격식 차리는 것 같기도 해 호칭을 바꿀까도 생각을 했지만 아직은 무리수였다. 그 정도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민규야 내가 너를 잊을 수 있을까. 내가 지금껏 겪은 대부분의 상황에 그랬듯 무감하게 네 이름을 부르고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전원우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아니오였다. 끊어낼 수 없는 얇은 실이 전원우의 목을 졸랐다. 그는 이 마저도 뻔하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한 이야기인가? 여느 청춘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나타나는 클리셰. 그렇게 여지없이 전원우는 김민규에게 불가항적으로 끌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불가항력은 날을 거듭할수록 몸을 불려 저를 세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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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뇌란 다른 것이 아니다. 단지 악의 일종이며 사탄과 맞먹는 정도다. 또 마약과 같아서 한 번 시작하면 끝도 없는데, 이상야릇한 흥분과 분위기도 그와 겹쳐 보여 현실감도 없다. 세뇌가 그랬고, 행복이 그렇고 불행이 그렇다. 한 마디로 전원우에게는 모든 감정이. 남들이 원하는 걸 얻고 행복하다고 하는 것도, 나락에서 불행하다며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도 다른 세계의 일처럼 아득했다. 반투명한 천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는 듯. 그리고 모든 세뇌와 감정은 김민규로부터 시작한다. 이러고 보면 전원우 인생에서 김민규를 빼고 논할 수 없다는 것이 참말이다. 그의 인생에서 주인공은 누구인가? 또 다시 전원우는 김민규에 표를 올인했다. 그리고 그의 이십 오 년을 미루어 볼 때, 이번에는 전원우가 맞았다.
김민규가 시작한 세뇌는 큰 것이 아니다. 그의 목표는 단지 전원우가 행복을 느끼는 것. 사실 노력이랄 것도 필요 없는 게 전원우가 김민규를 볼 때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전원우는 무감한 사람이라,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해 두자. 시작은 별이었다. 김민규는 별을 좋아했고 동경했다.
"형, 저 별은 왜 저기 있을까. 혼자 달랑. 나 같다. 나 형 자퇴하고 나서 같이 다닐 사람 한 명도 없었어. 곧 다른 별이 저 별 쪽으로 날아갈 거야. 형이 나한테 날아왔던 것처럼."
김민규, 말을 참 꽃 같게 한다. 비꼬는 것이 아니다. 정말 말을 예쁘게 하는 게 순간 설렐 뻔했다. 김민규가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리고는 전원우의 손을 이끌어 별을 가리켰다.
"별과 별이 부딪히면 파멸일걸."
전원우는 말을 참 좆같게 하고. 꼭 어느 소설의 명대사 같았다. 아름다운 별이 부딪히면 파멸이다. 김민규와 전원우가 각각 별이라고 쳤을 때, 둘이 만났으니 이제는 나락과 멸망만이 남았다. 하지만 전원우는 별이 아닌 어둠이었고. 여기서 나온 가설 하나. 짙은 어둠과 눈 부시는 별이 만났을 때 멸(滅)은 생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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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이 바뀌었다. 얼마되지 않는 페이지 안에 몇 달을 담아보려니 쉽게 바뀌는 건 당연했다. 이번 씬은 포장마차 안이었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유일하게 열다섯 때부터 연락해오던 십 년 지기 권순영. 마트 앞에서 쪼그려 앉아 요구르트나 마시던 중학생 둘이 이제 빨간 플라스틱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소주를 따른다. 역시나 뻔한 전개의 연속이다. 먼저 말을 꺼낸 건 권순영이었다. 붉은 염색모가 주황빛이 도는 조명을 맞아 더욱 쨍하게 보인다.
"너 김민규 좋아한다며."
만나자 마자 하는 얘기가 김민규다. 회동하는 건 오랜만인데, 다른 이야기 좀 하지. 전원우가 잔에 남은 술 몇 방울을 입에 털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다른 이야기야, 너 요새 머릿속에 그것밖에 없으면서. 권순영이 폭탄을 연이어 날린다. 완벽하게 맞았다.
"김민규는 너 좋아한대?"
"몰라. 아닐걸."
항상 이런 식이다. 권순영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대화 지분이 그가 90퍼센트고 전원우는 1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었다. 권순영은 한심하다는 듯 전원우를 쳐다보더니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이쯤 되면 식상한 표현이지만 이 말 말고는 설명할 바가 없었다. 뻔한 전개라는 소리다. 전원우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중 김민규를 좋아했던 건 상당히 예상 밖이었다. 좋아했다는 과거형을 쓰기도 애매하다. 현재 진행형으로 시제를 바꾼다. 전원우가 김민규를 좋아하는 건 예상 밖의 얘기다.
"얘기해버려."
"뭐라고?"
"뭐긴 뭐야. 그냥 좋아한다고 덜컥 말해버리라고. 또 칠 년 전처럼 호구 잡힐 일 있냐."
오랜만에 만난 애새끼가 못하는 말이 없네. 뭔 애새끼냐, 생일도 나보다 느린 게 누가 누구 보고. 키로 따지면 애새끼 맞지. 실없는 소리 그만해라.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오갔다. 휴대전화 시계를 확인해보니 오전 한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십일 월 삼 일. 두 번째 미팅이 남아있었고 오늘이 바로 삼 일이었다. 다음 미팅까지 열세시간 남았다. 그래봤자 김민규를 만나기까지 그 정도가 남았다는 뜻이지 별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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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왔어요?"
또 그 소리다. 이제는 형 소리만 들으면 환멸이 날 지경이다. 오늘의 착장은 회색과 베이지색이 감도는 배경에 체크무늬가 감도는 단정한 코트였다. 전원우야 뭐, 그 때와 똑같다. 몇 개 없는 기모 맨투맨에 청바지나 대충 입고 나왔다. 별로 중요한 일정도 아니라 생각되었을 뿐 아니라 몇 시간 뒤면 집에 들어갈 참이었으니 꾸밀 필요도 없었다.
이야기가 조용하게 오갔다. 전원우는 귓가에 웅웅거리는 목소리를 애써 모아보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집중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는 종이를 넘기고 이따금 노트북에서 타자를 치는 김민규의 손을 응시했다. 손톱 끝이 정리가 되지 않은 게 그 때와 똑같았다. 아, 자꾸 옛날이랑 비교하면 안되는데. 그러면 나 쟤 진짜 못 잊는데.
첫 만남과 달라진 점 하나. 전원우가 필사적으로 그의 감정을 내다버리지 않았다. 그 말은 김민규에게 마음을 조금 열었다는 뜻이 되며 동시에 세뇌당하여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는 의미도 내포된다. 문장을 줄이자면, 전원우가 김민규를 다시 좋아했다는 뜻이다. 그래프가 상승세였다. 첫 만남과 달라진 점 둘. 이 변화는 김민규에게서 일어난다. 떨지 않았다. 몇 번 만나고 능청스럽게 말 좀 툭툭 하더니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이러다 정 드는데. 전원우가 또 아무도 안 들리게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앞에 김민규가 있는데도 눈은 쳐다보지 않는다.
출판일이 잡혔다. 11월 23일이란다.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에 편집까지 무리라고 생각이 되었지만 김민규는 굴하지 않았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그가 전원우 앞에 놓여있는 빈 플라스틱 컵을 가지고는 일어섰다. 슬슬 자리를 뜰 낌새다. 전원우도 살살 눈치를 보더니 의자를 조용히 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연인지 김민규의 전략인지는 몰라도, 카페는 집 근처였다. 그는 집이 이 근처가 아니라 차를 타고 사거리를 세 번이나 지나야 했다. 그런데도 이 좁은 언덕까지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한 건지. 김민규가 손을 흔든다. 전원우는 눈동자에 초점이 잘 맞춰지지 않아 안경을 벗어 옷자락으로 대충 문지른다. 이제 또 언제 연락이 닿을지 모르는 일이니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눈에 담는다. 눈도 한 바퀴 굴리고는 힘을 주어 감았다 뜬다. 채 눈 앞의 물체가 선명하게 보이기 전에 귓가에 굉음이 울린다. 차 소리. 빠앙 하는 트럭 소리와 소리지르는 여자의 목소리, 혀를 차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도 귓가에 울린다. 그리고 초점이 서서히 맞춰지기 시작했을 때. 그래프가 꺾인다. 영화의 필름이 잘려 나가고 책의 중요한 부분이 찢겨 나간다. 온 기억을 지우개로 스윽 문지르고 간 기분이다.
전원우는 간결문이 특징인 작가였다. 어떤 작품이던 간에 문장을 길게 끌지 않았다. 그냥 탁 하고 짧게 끊어버렸다. 애초에 생각이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인간이라 그렇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어 머릿속에 들어왔다. 결론 도출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민규는 죽었다. 엄청난 굉음과 찢어지는 비명, 그리고 끈적거리는 붉은색 액체에 둘러싸여 숨통이 끊어졌다. 아무 말도 없이 일말의 변명조차 없이 픽 하고. 전원우는 살았다. 일 분 전만 해도 김민규와 함께 있던 그는 운이 좋게도 살아내었다. 물론 이는 언제까지나 주변인들의 시선이다. 전원우의 딴에서는 재수가 없었다. 그는 죽었는데 불행하게도 저는 살았다. 때로 피조물은 구세주보다 더한 운을 지니게 된다는데, 꼭 그 말과 들어맞았다. 예수가 십자가도 아니고 차에 치여 죽어버렸다. 모양 빠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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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없었다. 이 일곱 글자의 짧은 문장으로 현재 모든 상황이 종결된다. 김민규는 죽은 듯이 누워있었고 전원우는 죽은 듯이 앉아있는 상태였다. 정확하지는 않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김민규는 자는 듯이 죽은 것이고 전원우는 죽은 듯이 깨어 있는 것이다. 활자로 보면 감이 잘 오지 않지만 현장에서도 오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붉은 실이 끊어졌고 실의 끄트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온몸을 검으로 갈기갈기 찢어 놓는 고통이 목구멍으로 직격탄을 날렸다. 목이 불덩이처럼 뜨거워 침이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끝이라는 소리다. 원래대로라면 '전원우'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이유가 사라졌으니까. 그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민규가 사라졌고 이제 더 당할 세뇌도 없다. 이제 더 이상 밤하늘의 별이 안 보인다고 더 높이 올라갈 필요도, 나는 행복하다고 웃으면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대목에서 전원우는 스스로가 바보같다고 생각했다. 피투성이가 된 흰 옷을 입고 밑에는 사체가 그득한 거리를 걷는 것 같았던 요 몇 시간동안 -며칠도 아니다.- 그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깊게 발을 들인 탓이었다. 김민규가 사라져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살아졌던 것이다. 그 애가 하도 행복하라고 소리를 해 대서. 전원우는 그냥 그렇게 지내기로 했다. 행복한 채로. 동시에 좆같게도 곧 적응될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나질 않기도 했다.
몇 주를 죽은 듯이 지내던 차에 처음으로 집 밖을 나간 이유는 소설이었다. 출판일이 정해졌고 마지막 검토만이 남았다. 포차에서 권순영과 잠시 얘기를 나눴듯 소설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예전부터 이 일을 접어야지 싶은 생각은 줄곧 들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확실해졌다. 타자기로 더 두들길 이유도 없다. 여기서 더 어두워지면 출판할 책도 없다. 김민규도 없다. 이것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검토할 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출판사 관계자와 원고를 주욱 보고 디자인을 확인하는 게 끝이다. 책 앞에 "나의 별 K에게" 라는 말을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김민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불행과 행복 중간에서 전원우는 타자기로부터 손을 떼었다. 이야기가 끝난 것도 모자라 남의 서평까지 모두 읽었다. 영화로 친다면 엔딩 크레딧까지 다 올라가버린 셈이다. 평가는 짤막하다.
"그래서 살 수 있겠냐?"
전원우 인생 평론가 권순영의 말이다. 물론 쿠키 영상은 없다. 언젠가 김민규가 온다면 쿠키 영상이 생길 수 있겠지만, 다시 올 일은 없으니 그대로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김민규와 전원우의 엔딩을 정의한다면 해피 엔딩 정도가 되겠다. 애매하지만 그렇게 정했다. 그러지 않으면 김민규가 꿈에 나와 잔소리할 것만 같았다.
피와 손때가 가득 묻은 펜은 바닥에 떨어졌고
멸(滅)의 책은 제 책장을 덮었다.
더 이상 별이 보이지 않았다.
가설이 성립한다.
빛은 그대로 어둠에 먹혀버렸다.
메리
배드
엔딩
안녕하세요. 작가 전원우입니다. 이렇게 이야기의 끝에 작가의 말을 남기는 건 또 처음이라 새롭네요. 얼마되지 않는 분들이 이 글을 읽으시겠지만 그래도 남겨봅니다. 제 부족한 책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별로 없겠지만 독자 여러분 덕분에 책을 세 권이나 냈네요. 이번 책은 K의 도움을 받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책의 앞에도 언급했듯이, K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날려보낼 수 있다면 좋겠네요. 이 책을 끝으로 저는 작가 생활을 그만하려고 합니다. 작가라고 할 것도 없겠지만요. 모든 이메일은 잘 받았습니다. 응원 덕분에 힘 낼 수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까지 읽으시는 분들께, 여러분의 인생은 해피 엔딩이셨으면 좋겠습니다. K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세요. 아멘.
-전원우 소설집 '피묻은클리셰'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