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랑] 조연이 주연에게
2021. 2. 9. 00:15

 

은퇴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래도 나름 많은 일을 했고 연예계 인생이 끝나는 건데 누구 하나는 슬퍼 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더 건조했다. 기사는 세개가 나갔다. 왜냐? 전원우가 은퇴하는 그날 모 아이돌의 열애 기사가 터졌다. 사실 필모도 화려하지 않았고 주로 서브, 서서브남주를 맡았던 조연급 배우였기에 기사가 나가는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야심차게 준비했던 그의 은퇴기사는 올라온 지 한시간도 안 됐는데 바로 사라졌다. 새로고침을 하자마자 바로 깔끔하게 묻혀버리는 기사를 보면서 전원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운도 지지리 없지.

 

어쨌거나 일을 했던 보람은 있어 제 몸 하나 뉘일 집이 있는건 다행이었다. 어릴 때는 그래도 나름 광고도 많이 찍어뒀고 연예인티가 날 정도였는데, 나이가 점점 들면서 나름 그의 자랑이었던 냉랭한 얼굴은 밋밋한 페이스가 되었다. 배우들을 나란히 세웠을때 눈에 딱 띄는것도 아니라 어느 누가 남자주인공으로 써 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는 서브로 밀려났다. 서브에서도 서서브로 밀려날 때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가 인생에서 그나마 가지고 싶었던 연기라는 것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가 은퇴를 결심한 것은 그가 가장 사랑한 연기를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꽉 막힌 이 나라에서 남자와 남자의 스캔들이 터지는것은 그의 인생을 조져놓는것이나 다름 없었다. 소속사에서는 제대로 건수를 잡았다는 얼굴을 하고 그에게 은퇴 혹은 스캔들을 내밀었다. 전원우는 억울했다. 그는 게이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바이였지만 그날 정말 술에 취해 억지로 당한 키스 하나로 이렇게 까지 인생을 말아먹을줄은 몰랐지. 전원우도 질 수 없어 지금 찍고 있는 드라마 두개와 영화 하나는 끝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운은 그의 편이 되어주지 못했다.

 

 

 

“영화 하나는 엎어졌고, 드라마는 뭐라고?”

 

“원래 니가 들어가기로 했던 역할에 다른 사람을 써야겠대.”

 

“장난해? 그럴거면 뭐하러 나 불러다가 대본리딩은 시켰대??”

 

“어쩔 수 없지.”

 

 

 

하나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전원우는 악을 써봤자 본인만 손해라는것을 알았다. 영화 하나는 제작비의 핑계로 엎어졌고, 찍고 있던 드라마는 이제 종영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며 그나마 그가 사활을 걸어보려던 드라마에서는 짤리고 말았다. 공식적으로는 전원우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두번째로 랭크 되었던 보이그룹 멤버에게 넘어갔다고 기사가 났다. 말이 좋아 넘어간거지 관계자들은 다 알것이다. 전원우가 짤린거라고.

 

그렇게 전원우에게 남은 서브남주 역할이 끝나자마자 소속사는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전원우는 울며겨자먹기로 그걸 받아야만 했다. 이제 집에는 손벌리기가 애매했고 은퇴기사도 얼레벌레 묻히고 말았다. 전원우에 점 하나만 붙여 전원유로 돌아와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공식적으로 그는 백수가 됐다. 전직 배우, 현직으로는 백수. 집이 있는건 다행이지만 당장의 앞날은 막막했다. 대학때부터 쭉 연기를 해왔기 때문에 다른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이제 매니저도 없어 직접 발품을 팔아 연극단 부터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연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제2의 연기인생은 시작부터 망했다.

 

 

 

“죄송해요. 나이가 너무...”

 

“나이가 많이 걸리나요?”

 

“네. 아무래도 역할이 역할이다 보니..”

 

 

혹은,

 

 

“죄송해요. 저희가 원하는 남자주인공은 아닌것 같아요.”

 

“서브 남주로도 괜찮,”

 

“아뇨, 그냥 저희 대본에 별로 안 어울리는것 같아서요.”

 

 

 

이런 이유로 모두 전원우를 받아주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온갖 글을 다 뒤져 남자배우를 구한다는 글에는 모조리 연락을 넣었고 모두 떨어졌다. 가면갈수록 자신감은 떨어졌고, 자존감도 바닥을 쳤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볼 오디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때, 전원우는 차라리 인생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다.

 

 

 

 

 

*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살아날 놈은 살아나게 되어있었다. 전원우는 이상한 쪽으로 운이 좋았다. 그게 진짜 이상한 쪽이라서 문제였지만. 전원우는 제2의 연기인생을 시작했다. 시작은 했는데, 좀 이상한 쪽으로의 연기였다. 오디션을 봤던 극단의 극단장의 아는 사람의 아들이 하는 와인 바가 있는데 그쪽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전원우는 여기서 장기가 털리는건 아닌가 고민했다) 말이었다. 내키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꼭 사람을 쓸데 없이 조급하게 만들어서, 전원우는 의심을 가득 품었으면서도 향수까지 뿌린뒤 그곳으로 향했다.

 

와인바는 인테리어가 진짜 대박이었다. 이런쪽으로는 하나도 모르는 전원우가 그냥 입을 떡 벌리고 기가죽어 의자에 얌전히 앉아있기만 했으니까. 안쪽에서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와 전원우의 어깨를 툭 두드리곤 ‘이따 열시.’ 라는 말을 남긴채 가버렸다. 척봐도 전원우보다 더 젊어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전원우는 그 말을 무시 할 수 없었다. 와인바는 보통 저녁부터 시작하는데 해가 쨍쨍한 시간에 온것부터가 잘못이라는건 몰랐지만.

 

어쨌거나 전원우는 합격을 했다. 아르바이트는 아니고 진짜 근로계약서 까지 써서 채용된 인재였다. 와인만 팔긴했지만 안주가 나가는 곳이라 설거지 막내부터 시작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전원우의 할일은 간단했다. 바에 앉아 와인이나 홀짝거리기만 하면 끝. 처음에는 진짜 약이라도 탄줄알고 입술에만 댔던 와인은 정말 맛이 좋았고, 앞에 놓인 마른 안주도 딱 전원우의 취향이었다. 급하게 빠져야 했던 돈 때문에 2주치 주급을 땡겨받은 전원우는 곧 그 이상한 일에 조금씩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원우씨는 여기서 맨날 누구 기다려요?”

 

“글쎄요... 신이 점지해준 짝?”

 

“와. 그런거 믿어요?”

 

“당연하죠. 제가 얼마나 운명론자인데.”

 

 

 

사실 무신론자에다 우연이라고는 믿지도 않지만.

 

 

 

“저는... 딱, 제가 봤을때 이 사람이다. 하는 사람이 좋아요.”

 

“되게 단순한데 어렵네요.”

 

“그쵸.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

 

 

 

구라다. 어제도 원나잇했다. 그리고 서로 아침에 모르는척 하고 따로 방을 나섰다.

 

 

 

“예전에 딱 한번 그런적이 있었는데, 헤어지고 나서 너무 힘들었어요.”

 

“저런. 헤어진 애인은 꼭 마주친다는데, 만난적은 있어요?”

 

“제가 엄청 매달렸는데 가버리더라구요. 그 뒤론 안해요.”

 

 

 

당연히 그런적 없다. 헤어질때 엄청 추하게 서로 머리채 잡고 싸웠다. 헤어진 애인은 마주치자마자 서로 쌍욕을 했고, 또 싸웠다. 사람들이 다 보는데서 싸웠는데, 그때는 무명이라 기사가 안났다. 게다가 서로 쌍방이라 쪽팔린건 알아서 대충 합의보고 끝냈다. 그래서 전원우는 그 뒤로 연애보다는 원나잇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원우는 있지도 않은 대본을 줄줄 읊었다. 서브남주 하던 짬이 있어 이야기를 지어내는것도 쉬웠고 받아치는것도 쉬웠다. 그는 언제나 한발짝 뒤에서 여주의 사랑을 응원이나 하는 역할이었으므로 이런쪽으로는 도가 텄다. 사람들은 전원우의 소문을 듣고 조금씩 와인 바에 출석도장을 찍으러 갔다. 전원우는 앉아있는것 만으로도 그 와인바의 명물이 됐다. 어쨌거나 전직 배우였고 그의 사연있어 보이는 얼굴은 꼭 한번 말을 걸거나 건드려 보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선배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람이 오는건 원하지 않았다. 전원우가 대놓고 뭐 씹은 얼굴을 했다. 처음에는 검은 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왔길래 종종 있는 미친놈인가 싶어 몸을 사렸다. 그래서 일찌감치 사장 옆으로 슬그머니 이동을 했는데 마스크를 내린 얼굴이 꽤나 낯이 익었다. 게다가 전직 배우에게 까지 꼬박꼬박 선배님을 붙일만한 인물은 많지않았다.

 

 

 

“민규씨? 오랜만이네요.”

 

“사장님 아는 사람이에요? 그럼 전 이만.”

 

“아, 저, 선배님이 여기 있다고 해서..”

 

 

 

전원우는 눈앞의 남자를 잘 알고 있다. 그에게서 마지막 동앗줄을 낚아채간 사람이었다. 전원우가 짤리고 새로 들어간 아이돌 그룹의 연기 멤버. 김민규. 김민규는 그 드라마를 발판삼아 다음 드라마에서 주연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한번도 주연을 놓쳐본 적이 없다. 전원우는 김민규가 잘 못 한것도 아닌데 김민규에게 가지고 있는 악감정이 꽤나 컸다. 전원우가 대놓고 불편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김민규는 머뭇거리다가 전원우에게 작은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쓱 봐도 고급이었다. 전원우는 이런거나 받을 사이가 되나 싶어 받지도 않고 거절을 했다.

 

그리고 김민규는 끈질겼다. 전원우가 있는 시간과 요일에 맞춰서 꼬박꼬박 와인바를 찾았다. 하루하루 들고 오는 선물도 다양했다. 전원우는 그 선물을 모두 거절했다. 좋게 말해서 거절이었지 그냥 거들떠도 안봤다. 김민규는 전원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전원우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은 이제 김민규를 넘어서야 한다는걸 알아챈 모양인지 더이상 와인바에 오지 않았다. 손님당 얼마라는 인센이 있는 전원우의 입장에서는 난감했다. 김민규가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는것도 불편했고 이런식으로 영업방해를 하는것도 싫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선배님. 말씀 편하게..”

 

“저 이제 배우도 아니고, 민규씨랑은 더 엮일일 없는데 어떻게 제가 선배가 되는거죠?”

 

“그, 그래도 저보다 연기를 먼저 하셨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불편해요. 이것도 영업방해라서. 민규씨 때문에 제가 손님영업을 못하고. 사장님도 난감해 하세요. 저랑 자고 싶은 사람들이...”

 

“선배님이랑 누가 자는데요.”

 

“그게 지금 중요해요?”

 

“네. 저는 중요해요.”

 

 

 

전원우는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얘기가 왜 이렇게 돌아가? 서로 무적의 논리로 말싸움을 하니까 끝이 없었다. 전원우는 말문이 막혔고 김민규는 화가 났는지 싸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걸 보면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사장은 이마를 짚었다. 오늘도 공쳤다는 뜻이다.

 

 

 

 

 

*

 

 

 

 

 

그 뒤로 김민규의 방문이 뚝 끊겼다. 전원우는 안심했다. 사람들은 전원우의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 다시 전원우를 찾았다. 전원우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함을 가득 안고 있는 처연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연기력은 절정을 찍고 있었다. 그가 수입에 변화가 없기를 매일 빌었기 때문이다. 마음한구석으로는 좀 너무했나? 라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통장에 찍히는 금액을 보면서 그 생각은 싹 사라졌다. 사람은 맺고 끊음이 확실해야 하는 법이었다. 암.

 

그러나 김민규는 딱 삼개월 뒤에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사장과의 계약서를 들고서. 어디갔다왔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 전원우를 힐끗 본 김민규는 자기 tmi를 줄줄 늘어놓았다. 해외공연이 있었고 간김에 뮤비촬영을 좀 하느라고 늦었다고 했다. 화가나서 오지 않은게 아니고 자기 스케쥴 때문에 못 온거다. 전원우는 이마를 짚었다. 김민규는 전원우가 받지 않을걸 알면서도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오늘은 작은 악세사리였다. 귀걸이였는데, 전원우가 귀를 뚫은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걸 꺼내 귀에 대주기까지 했다. 잘 어울리네요. 다행이다. 전원우는 김민규의 의중이 진짜 궁금했다.

 

 

 

“게이에요?”

 

“아니요.”

 

“그럼. 질문을 바꿔야겠네. 설마 나한테 관심있어요?”

 

“그건 맞습니다.”

 

“게이 아니라면서요.”

 

“네. 게이는 아니고.”

 

 

 

전원우는 곧 김민규에게 흥미를 잃었다. 그러면 한번 자러 온 놈이군. 그리고 곧 김민규가 내미는 계약서를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믿기지 않아 계약서와 김민규와 사장을 번갈아서 쳐다봤다. 사장은 어깨를 으쓱했고 김민규는 빙글빙글 웃기만 했으며 계약서에는 선명하게 두 사람의 지장이 찍혀 있었다.

 

 

 

“갑, 사장은. 을, 김민규에게. A 전원우를 제공한다.”

 

“그렇죠.”

 

“A는 을이 제공하는 300만원을 받고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한다.”

 

“잘 읽네요.”

 

“아니, 내 동의 없이 어떻게 이게 되는거에요? 가능한거야?”

 

“네. 사장님은 이 계약서로 1000만원을 벌었거든요.”

 

“근데 난 꼴랑 삼백? 장난해요?”

 

“대신에 딱 세번이에요. 나랑 세번만 만나요.”

 

 

 

손가락 세개를 들어올리면서 씩 웃는 얼굴이 재수없을 정도로 잘 생겼다. 전원우는 말문이 막혀 사장을 쳐다봤다. 전원우가 어이없거나 말거나 김민규는 전원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뜨끈한 손바닥이 닿아오자 전원우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람의 온기가 닿은게 참 오랜만이었다. 김민규는 손을 옮겨 전원우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마른 손목이 한손에 다 들어갔다. 김민규는 그걸 빤히 쳐다봤다. 전원우는 민망해서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곳에 두었다. 마른 몸은 그의 자랑이었지만 꽤나 큰 단점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취향이 되지 못하는 몸은 단점이 되기 마련이었다.

 

오늘부터 첫날로 해요. 김민규는 외제차에 전원우를 태우고 드라이브를 했다. 전원우는 장롱면허만 10년째였는데 김민규는 운전을 한지 꽤 됐다고 했다. 어느정도 돈을 모으자마자 제일먼저 차를 샀다고 신나서 떠들었다. 그리고 아직 저녁도 먹지 못했다는 말에 전원우를 데리고 근사한 식당을 갔다. 전원우와는 다르게 유명인사인 김민규와 다니는건 꽤나 많은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전원우는 이런 자리가 불편하다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김민규와 나란히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첫 번째 만남의 끝은 전원우가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걸 전부 게워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두번째 만남은 김민규의 집이었다. 김민규의 집에 초대된다는것도 불편한데, 그와 단둘이 있는걸 상상하니 벌써 답답했다. 전원우는 양 손에 주스세트를 들고 그의집으로 갔다. 연차가 어느정도 쌓여 미리 독립을 했다는 김민규의 집은 전원우가 살고 있는 집보다 세배는 넓어보였다. 배알이 꼴린 전원우는 그날 김민규와 술을 진탕으로 마셨다. 니가 뭐 그렇게 잘나서 내 자리를 빼앗았냐고 별 지랄을 다 했다. 다음날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맨몸으로 일어났지만 물론 전원우는 기억나지 않는 척 했다. 김민규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걸 보니 어떻게 잘 넘어간 모양이었다.

 

 

 

“요새는 안오네?”

 

“네. 딱 한번 남았는데.”

 

“선불로 긁었는데 아깝지도 않나?”

 

“사장님은 저 팔아넘기고 양심은 찾으셨나요?”

 

“설마.”

 

“다음에 이런식으로 하면 저 여기서 일 안해요.”

 

“여기 그만두면 갈 곳은 있고?”

 

“와... 개 싸가지없는데 맞는 말만 하시네요.”

 

 

 

전원우는 사장과 농담따먹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종종 손님들이 오면 말상대를 해주곤 했다. 그러나 모두가 좋은 손님은 아니었다. 가끔 전원우는 진상을 마주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운이좋아 여러번 피하긴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나보다. 무작정 손목을 잡아 끌며 나랑도 한번 자 달라고 애원하는 찌질한 놈도 손님이라도 차마 발로 차지도 못하고 말로만 이러시면 안된다고 만류했다. 다들 말릴생각이 없어보였다. 이렇게 뚫리면 다들 이런식으로 달려들 생각인것 같았다. 느껴지는 시선이 역겨워서 전원우가 막 발을 들어 차버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달려들어 찌질남의 손목을 우산으로 내리 쳤다. 뻑, 소리가 날 정도로 힘에 가감이 없었다. 전원우는 놀란 눈을 했다. 그가 전원우의 손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전원우에게도 충격이 갔다. 찌질남은 술에 취해 혼자 뭐라고 씨부렁 대면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찌질남을 봐줄 생각이 없었는지 우산으로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마치 채찍을 휘두르는것 처럼. 퍽, 으로 시작했던 소리가 뻑으로 끝나고 우산이 두동강 났다. 주위는 고요해졌고 전원우는 눈앞에 갑자기 등장한 주인공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별 미친새끼가...”

 

“...너 미쳤니?”

 

“다친 곳 없어요?”

 

“아니, 지금 이게..”

 

“왜요. 누가 신고하면 어쩌나 싶어요?”

 

 

 

자긴 하나도 잘못 한게 없다는 얼굴이라 전원우는 어이가 없었다. 시선을 모조리 빼앗아 가버렸다. 이래서 주인공이구나. 김민규는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 찌질남을 쳐다보다가 주위를 휘 둘러봤다. 얼굴이 팔렸지만 어쨌거나 가해자는 저쪽이었고 김민규는 멋지게 전원우를 구해주러 나타난 주인공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그러려니 하고 찌질남을 측은하게 쳐다보다가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바빴다. 찌라시 돌겠네. 김민규는 투덜거렸지만 딱히 신경쓰는 얼굴은 아니었다. 전원우의 손목에 벌겋게 남은 손자국이 더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전원우는 손목을 감추고 김민규를 쳐다봤다.

 

 

 

“그동안 왜 안왔어? 딱 한번 남았는데.”

 

“딱 한번 남았으니까 안왔죠.”

 

“...”

 

“사실은 스케쥴이 너무 밀려서. 일 하느라 못왔어요. 선배님은 그런거 찾아보지 않겠지만.”

 

 

 

김민규가 딱 잘라 말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전원우는 김민규와 만나면서 하루에 한번씩은 꼭 김민규를 서치했다. 김민규에 대해서 뭐라도 알아야 할것 같은 의무감 같은게 있었다. 그러다가 김민규의 필모그래피에 이름을 올린 드라마와 영화는 전부 봤다. 어느정도 편집의 힘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누가보든 김민규는 주인공에 어울렸다. 그리고 지금 정말 어느 영화의 주인공처럼 등장해 엑스트라 혹은 직원1 역할에 불과한 전원우를 구했다. 전원우는 이런 드라마의 흐름을 잘 안다. 이런 주인공에 반한 여주인공이 등장해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시작된다. 전원우는 그 둘 사이에 끼어 들 수가 없다. 엑스트라니까.

 

어쨌거나 마지막 만남이 성사됐다. 사장에게 뒤를 맡긴 김민규는 전원우를 차에 태웠고 (좀 배알꼴렸던건 저번에 탔던 차랑은 달랐다.) 전원우는 다른곳도 아니고 제 집 주소를 네비에 찍었다. 몇날밤을 고민해도 마지막 만남에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할 곳은 여기밖에 생각이 안났다. 전원우가 손을 벌벌 떨면서 도착지를 지정하자 김민규는 그게 어디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전원우가 입력해준 곳으로 성실하게 운전을 했다. 마지막 장소 만큼은 전원우가 더 유리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들어도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전원우의 아지트.

 

 

 

 

 

*

 

 

 

 

 

전원우의 들어온 김민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전원우는 별거 없는 집인데도 괜히 예의 차리나 싶어 편하게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전원우는 옷을 갈아입으러 갔고 그 뒤로 주방에는 지옥이 펼쳐졌다. 저녁을 해먹자길래 그럼 난 가만히 있겠노라 선언했더니 그릇을 깨먹고 뭘 떨어트리고 컵은 벌써 두개나 깨지고... 전원우는 김민규가 사고를 칠 수록 묘한 얼굴을 했다. 이새끼가 미쳤나? 김민규는 귀가 뻘겋게 되가지고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 전원우는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미 주방이 난장판이라 뭘해도 다 실패 할 것 같았다.

 

결국 선택한건 음식 배달이었다. 전원우는 피자가 땡겼고 김민규는 별로 입맛이 없다고 했다. 김민규는 아까 찌질남을 두들겨 팰 때랑은 또 다르게 혼자 시무룩 해져서 얌전히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게 커다란 개 같아서 전원우는 저도 모르게 괜찮다는 의미로 김민규의 머리를 토닥였다. 딱히 샵에 다녀온것 같지도 않으니 이정도는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컸다. 김민규가 놀라 몸을 움찔 하더니 이내 전원우의 손에 제 머리를 더 부비며 좋다고 끙끙 거렸다. 전원우는 그제서야 김민규가 칭찬에 목말라 있었다는걸 알았다.

 

 

 

“괜찮아. 다친곳 없잖아.”

 

“그래도 선배님 집이잖아요..”

 

“괜찮아. 다시 사면 돼.”

 

“제가 사 드릴게요.”

 

“딱 세번이었던거 알지?”

 

 

 

전원우가 딱 선을 그어버렸다. 사실 좀 더 만나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문득 허무한 은퇴과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보이그룹의 인기 멤버를 이런식으로 무너지게 할 수는 없었다. 김민규는 입술을 삐죽 내밀에 그 말에는 반박도 못했다.

 

 

 

“세번 아니고 다섯번이라고 할 걸 그랬어요.”

 

“그래도 달라지는건 없었을걸?”

 

 

 

타이밍 좋게 도착한 음식들을 테이블에 놓으며 전원우가 대꾸했다. 편한 옷을 입은 전원우가 자꾸 흘러내리는 소매를 둥둥 걷고 상을 차리는데 김민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지고 왔던 와인도 함께 내놓는다. 김민규가 컵을 깨는 바람에 딱 하나 남은 컵에 서로 나눠 마시기로 했다. 전원우는 피자 하나를 집어 우물거렸다. 안먹어? 김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들어가는 드라마 때문에 관리를 해야 한다나 뭐래나. 그 말을 듣고 전원우도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엄청 맛있었던 피자치즈가 지우개를 씹는것 처럼 질겅질겅 했다.

 

미련은 엄청 많이 남아있었다. 김민규를 보는 내내 연예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와인바에 앉아 사람상대를 하면서도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혼자 뻘생각을 할때도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니까 인생자체가 허무하게 무너지는것 같았다. 김민규는 자기가 말 실수를 했다는걸 알았는지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다가 입술만 몇번 움찔대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전원우는 같이 배달온 콜라를 벌컥 들이켰다. 속이 답답해서 이런걸로라도 뚫어줘야 했다.

 

 

 

“왜 나였어?”

 

“예?”

 

“왜 나 찾았냐고. 자는게 목적이었으면..”

 

“저번에는 제정신 아니었잖아요.”

 

“어쨌거나. 왜 날 찾았냐고. 빨리 대답해봐.”

 

 

 

전원우는 이제 더 물러설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지나면 정말 김민규를 만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김민규는 입술을 삐죽삐죽 거리면서 대답을 망설였다. 전원우는 김민규의 옆에 털썩 앉아 김민규가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김민규는 전원우를 한번 쳐다봤다가 스르르 전원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새끼가 끼를 부리네. 전원우는 피할까 하다가 그대로 김민규를 받아줬다. 김민규는 괜히 전원우의 어깨에 얼굴을 부빗거렸다. 2미터 가까이되는 덩치를 가진 놈이 이런 애교라니 소름이 돋았지만 어쨌거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김민규는 망설임 끝에 오래전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김민규가 아이돌로 데뷔하기전에 처음 봤던 영화에서 전원우를 봤다고 했다. 어느 그룹의 막내아들로 나와 제일 먼저 죽어버린 역할이라고. 전원우는 천천히 과거를 더듬었다. 확실히 그런 역할을 했던 적이 있다. 꽤나 고급스러운 세트장에서 촬영을 해서 촬영하는 내내 신기한 경험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역할이 그렇게 좋았다고? 전원우는 믿기지 않아서 김민규를 힐끗 쳐다봤다. 개수작도 정도껏 하라고 딱 잘라서 말하려는데, 김민규가 전원우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데 그 영화를 재밌게 봤던건 저 혼자 뿐이었거든요. 멤버들은 다 별로라고 했고..”

 

“그래서?”

 

“거기에서 선배님이 진짜 딕션이 너무 좋아서.. 그게 부러웠어요. 저는 가끔 막.. 말도 버벅 거리고 발음도 이상한데.”

 

“아이돌이 딕션 좋아서 뭐하려고.”

 

“저는 래퍼 포지션이니까요.”

 

 

 

전원우는 김민규의 손을 털어내지도 못했다. 알고보니 김민규가 연기로 빠졌던 이유는 팀내에서 인기는 좋았지만 말 그대로 얼굴 마담의 역할만 하는 정도라서, 자기도 정확하게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하라니까 무작정 시작한거라고 했다. 듣고보니 너무 불쌍해서 전원우는 김민규의 손을 좀 더 꾹 잡았다. 연기는 나쁘지 않은데 발음이 별로라는 평이 김민규를 늘 조급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김민규가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것을 전원우가 가지고 있어 더 눈이 갔다고. 고작 그게 전부라는 말이 전원우를 허무함에 물들게 했다. 그리고 전원우는 김민규에게 밀려서 은퇴를 했고, 김민규는 그 뒤로 꾸준히 연기를 했고.

 

 

 

“고작 그거였구나..”

 

“선배님 은퇴기사 보고 너무 놀랐어요. 그리고 그 뒤로 무작정 선배님을 찾았는데..”

 

“연기 연습은 혼자서 하던가 회사한테 부탁하는걸로 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선배님, 그러니까, 저는..”

 

 

 

전원우는 더 들어줄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먹지도 않은 피자를 정리했다. 다 식어버고 굳어버린 피자를 다시 먹고 싶은 마음은 없어 전부 쓰레기통에 쳐 박았다. 그 꼴이 꼭 전원우 본인 같았다. 전원우는 허리에 손을 얹고 숨을 훅 몰아쉬었다. 뒤에서 김민규가 어쩔줄 몰라하는게 다 느껴졌다. 이집에 더 김민규를 두고 싶지 않았다. 전원우는 김민규를 보지도 않고 그만 가라는 말을 짧게 했다. 김민규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김민규가 가고 나면 침대로 들어가 잘 생각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당분간은 가게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사장한테 전화를 해서 쓰지도 않은 휴가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전원우의 몸이 휙 돌아갔다.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김민규가 무작정 입술을 물었다. 전원우는 김민규를 밀어내려고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하지만 김민규는 전원우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김민규의 어깨를 퍽퍽 두드리던 손은 어느새 김민규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진정하라는듯이 입술을 혀로 핥으며 눈치를 보던 김민규는 전원우에게서 한발짝 떨어졌다. 전원우는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벅벅 닦았다. 요새 애들은 할말이 없으면 무작정 키스부터 하나. 김민규는 울것같은 얼굴을 하고 전원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연기일지도 몰라. 전원우는 김민규를 끝까지 의심했다. 하지만 진짜 울어버리는 김민규를 보면서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는것 같았다.

 

 

 

“왜, 왜 울어. 너.”

 

“제가, 흑, 제가 얼마나 선배 찾았는지도 모르, 모르면서..”

 

“아니, 나는, 널 모르니까...”

 

“맨날 와인 바 가서 맛도 없는 와인 마시느라, 흐윽, 고생한것도 모르면서..”

 

“와인 맛이 없었어? 아니, 그건 내가 모르니까..”

 

“저는, 흐, 선배 때문에 연기하고, 싶었는, 데, 흐어어어...”

 

 

 

갑자기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전원우는 허둥지둥 김민규를 끌어안았다. 전원우의 허리를 안은 김민규가 엉엉 울었다. 살다살다 전원우 때문에 연기를 시작했다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정신없이 우는 김민규를 달래면서도 손이 벌벌 떨렸다. 이렇게 까지 기분이 좋은 적이 없었다. 김민규가 눈물때문에 젖은 얼굴을 들고 전원우를 쳐다봤다. 전원우는 김민규의 얼굴에 약했다. 사실 누구라도 약하지 않을까? 이렇게 잘생긴 얼굴이 심지어 울기까지 하고 있다면 무슨 개 소리를 해도 성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전원우는 김민규의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줬다. 눈을 찡긋거리는 김민규를 보면서 안쓰러움과 동시에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울지마. 전원우가 자동으로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김민규는 더 서러워졌는지 울먹울먹 거리다가 전원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벼댔다. 전원우가 김민규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허리를 안은 손이 하나는 전원우의 옷안으로 파고들어 등을 쓸어내렸고 하나는 엉덩이로 내려갔다. 이새끼가? 전원우가 김민규를 훅 밀어내려고 했는데 이미 김민규가 한 수 위 였다. 전원우의 목덜미에 쪽쪽 입술을 박았다. 전원우는 기가 찼다. 결국 세번째 만에 이렇게 넘어갈줄 알았다면 빙 돌아오지 말걸, 그런 생각을 좀 했다.

 

 

 

 

 

*

 

 

 

 

 

와인바에 출근한 전원우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영업을 했다. 그런데 퇴근을 존나 꼬박꼬박 잘 했다. 사람들이 말이라도 붙여볼라 치면 근무시간이 끝났다고 딱 선을 그었다. 그래서 더 희귀해졌다. 소문에는 연하 애인을 만나서 얼굴이 겁나 좋아졌다는 말만 돌았다. 전원우는 딱히 그 소문을 정정한다거나 없애고 싶지 않았다. 딱히 틀린말도 아니었다. 결국 세번째 만남에 삼백 받고 전원우는 김민규에게 쏠랑 넘어갔다. 어린 애가 생각도 바르고 몸도 좋고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자기만 좋다고 하는데 안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삼백으로 김민규에게 목줄을 채웠다. 커플 목걸이를 사다가 김민규를 줬더니 그 이후로 씻을 때도 빼지 않고 잘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좋았던지.

 

오늘도 좋은 차로 전원우를 모시러 온 김민규는 꽁꽁 싸매지도 않은 날것의 그대로인 상태였다. 전원우는 저 메이크업 하나 없는 말간 얼굴을 좋아했다. 김민규가 어디서도 보여주지 않는 얼굴이어서. 전원우는 생각보다 소유욕이 많은 인간이었고 김민규 한정으로 질투심도 어마어마 했다. 김민규는 전원우를 데리고 한시간은 연기연습을 했다. 전원우가 가장 좋은 상대라고 아부까지 떨었다. 대본을 받은 전원우가 그걸 찬찬히 보는 것도 좋아했다. 꼭 여자주인공 역할을 맡기는걸 싫어하면서도 꼬박꼬박 대사는 쳐줬다. 그러니까 어디서 어떻게 스킨십이 있는지, 키스씬도 있는지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로 키스 할거야?”

 

“응. 해야 한대요. 엄청 진하게.”

 

“하, 돌겠네.”

 

 

 

김민규는 전원우가 이렇게 질투 하는걸 무지 좋아했다. 그래서 히히 웃으며 전원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로 쪽쪽 소리를 내면서 애교를 부렸다. 평소에는 보여주지도 않는 질투를 너무 대놓고 보여주는게 좋았다. 전원우가 씩씩거리는걸 가라앉히려고 또 키스를 했다. 전원우는 김민규의 몸에 약했고 김민규는 그걸 또 너무 잘 알았다. 둘이서 같이 운동이라도 하러가면 전원우는 대놓고 김민규의 가슴과 허벅지를 쳐다보곤 했으니까. 침대에서 죽여준다고 말하더니 진짜 좋아하는걸 숨기지 못해서 김민규는 혼자 깔깔 웃곤 했다.

 

 

 

“와인바 안나가면 안되는거죠.”

 

“응. 거기는 계속 나갈래.”

 

“다른 사람이랑 있는거 싫은데.”

 

“그래도 출퇴근시간 따박따박 잘 챙겨야 돈이 나오지.”

 

“내가 수업료 내겠다니까..”

 

“너랑 헤어지면 나 그럼 손가락만 빨아?”

 

“헤어지겠다는 말을 왜 해...”

 

 

 

어이구 또 운다. 전원우가 김민규를 놀리면서 볼을 꼬집었다. 진짜 서운해 죽겠다는 얼굴이라서 전원우가 얼른 김민규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연애 시작한지 100일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헤어지네 뭐네 말을 하는게 너무 서운하다고 쫑알쫑알 말을 하는게 퍽 귀여웠다. 전원우보다 한뼘은 더 큰놈이 이렇게 귀여워보여도 문제가 있는건데. 전원우는 좀 심각하게 제 눈에 낀 콩깍지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김민규의 허리를 푹 끌어안았다. 다른데 가서 몸자랑이나 좀 하지 말지.

 

김민규는 아직도 아이돌과 연기를 겸하고 있다. 전원우는 그가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하면서도 저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김민규는 전원우를 사랑하는 일에도 열정적으로 임했다. 전원우는 이제 김민규의 집에 눌러살고 있지만 정작 김민규는 티비에서 더 많이 보곤 했다. 티비에 나오는 김민규는 정말 누가봐도 주인공에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연기를 한다. 주인공에 김민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넣는다는걸 전원우는 이제 이해 할 수 없었다.

 

그에비해 전원우는 아직도 주인공역할은 부담스러웠다. 인생에서 주인공인것도 버거운데 다른 누군가의 주인공이 된다는걸 상상할 수 없어졌다. 다만 그냥 이렇게 주인공의 옆에서 조연으로 살아가는것도 썩 나쁘지 않다는 걸 최근들어서 배우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절절 매는 드라마와는 다르게, 남자주인공이 조연1에 절절 매는 기묘한 드라마를 찍고 있는 현실이지만 어쩄건 드라마는 끝나기 마련이었고 현실은 두 사람이 끝내지 않는다면 100부작이고 1000부작이고 끝까지 질질 끌고 갈수 있었다. 연애란 자고로 그렇게 질질 끄는 법도 있어야 했다.

 

 

 

“무슨 생각해요?”

 

“응?”

 

“표정이 막... 막 이상해.”

 

“그냥... 너랑 길게 만나야 겠다는 생각?”

 

“아니, 그런 생각을 막.. 음흉한 얼굴로 해요?”

 

“길게 만나면.. 아무래도 많은걸 하니까?”

 

 

 

전원우의 말에 김민규가 아휴, 하고 못말리겠다는 반응을 했지만 좋아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전원우의 턱을 살짝 잡아 끌어당겨 입술을 댔다. 전원우는 자연스럽게 김민규의 목을 끌어안았다. 김민규는 시계를 힐끗 봤다가 그대로 전원우를 번쩍 안아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사랑에 빠진 주인공들은 꼭 키스를 하고 침실로 가서 이불을 몇번 들썩거려줘야 했다. 주인공인 김민규는 그걸 아주 잘 알았고 이 기회에 조연인 전원우에게도 알려줄 생각이었다. 침대에서 더 솔직해지는 전원우는 아주아주 귀여웠다. 그걸 독점하는건 주인공의 특권이었다. 김민규는 언제나 주인공일 것이고, 전원우는 그 옆에서 늘 떠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의 연애는 늘 해피엔딩이었다. 김민규와 전원우의 연애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