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이오스] 이기심의 실
2021. 2. 9. 00:14

*자살•살인 등의 트리거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중심적이다. 내가 아는 전원우도, 항상 그랬다. 물론 나도, 항상 자기중심적이다.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동물이라고.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필연적인 존재였다. 그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만났던 건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다. 우린 어렸다,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감정을 잘 알지도 못할 만큼. 그때의 전원우는 고 2이자 학교의 학생 부회장이었다.

 

 

“안녕, 민규야?”

“... 누구세요.”

“이번에 새벽 고등학교 입학하는 김민규 학생 맞지?”

“... 네, 맞는데요.”

“이번 입학 선언문, 네가 읽게 돼서 말이야.”

“그런 거 안 할 건데요,”

 

 

나는 그 당시 예민함이 최고조를 찍고 있었고, 시간도 없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할 준비도 해야 했고, 할아버지의 명령에 의해서 경영 수업까지 들어야 했다. 학교 공부? 그런 건 할 시간도 없었다. 그저 난, 경영을 위해 태어난 것 마냥 경영 공부를 해야만 했다.

 

 

물론 공부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내 입으로 말하긴 뭐 하지만 내 머리는 탁월한 편이었고, 남들처럼 공부에 매달리지 않아도 전교 1등까지는 아니더라도 전교 10등 안에는 들었다.

 

 

어쨌든, 나는 바빴다. 입학 선언문쯤이야 읽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튀는 걸 좋아할 사람은 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삼촌과 할아버지의 친구, 그 외에도 많은 적들이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하나라도 튀는 순간 바로 끌어내려질 것이 분명했다.

 

 

“왜 안 할 건데?”

“전 누구 앞에서 뭐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좋은 경험이 제게는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누구신데 저한테 이렇게 강요를 하시는 거죠?”

“새벽 고등학교 학생 부회장, 아 이제는 회장이 될 거지만.”

“선배, 아니 아직 입학도 안 했으니 선배는 아니네요. 근데 그게 뭐요?”

“내가 이번에 회장이 되려면, 입학식을 성공적으로 진행시켜야 하거든. 한 번만 협조해 주는 건 어때?”

“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걸 하면 제게 무슨 대가가 있는데요?”

“민규야, 네가 제일 조건에 잘 맞아서 그래. 그리고 너한테도 도움이 될 텐데?”

“그게 저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 건데요?”

“네 지지 기반에 도움이 되겠지.”

 

 

전원우의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그게 무슨 소린가라는 생각을 멍하니 10초 정도 했다. 지지 기반이라니, 그런 게 나에게 존재할 리가 없었다. 이미 삼촌은 M 그룹의 사장이라 지지 기반이 든든했고, 할아버지의 친구는 이미 부회장이었다. 그런데, 아직 미성년자인 내가, 지지 기반이 있을 리는 당연히 없었다.

 

 

“민규야, 우리 손을 좀 잡을까?”

“... 싫은데, 대체 그쪽이 무슨 속셈인지 난 도저히 모르겠거든.”

“그냥 단순히 손을 잡자는 의미였는데, 일단 집에 좀 들어갈까?”

“...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그럼.”

 

 

우리는 일단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전원우는 대단했다. 자기 집인 것 마냥 소파에 앉아 고양이처럼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홀린 듯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W 그룹의 후계자 후보 중 하나인, 전원우라고 해. 이름은 들어 봤으려나?”

“... 들어는 봤죠. 이 바닥에서 워낙 유명하시니까.”

“나도, W 그룹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선 짓밟아야 하는 다른 후보들이 있는데, 서로 동병상련하는 게 어때?”

“그게 입학 선언문 읽는 거랑 무슨 관련이죠?”

“새벽 고등학교가 W 그룹 계열 사립학교인 건 알아?”

“알죠, 그래서, 제가 궁금한 건 그쪽이 원하는 게 뭔지, 그리고 나한테 왜 이러는지 인데요.”

“내가 널 M 그룹의 후계자로 올려줄게. 그 대신, 나랑 거래 하나만 하자.”

“일단 말해봐요.”

“이번에 입학 선언문 읽어주면, 내가 너랑 결혼해 줄게.”

 

 

나쁘지는 않은 조건이었다. 둘이 결혼하면 두 그룹 간에 연결 고리가 생기게 되고, 그리되면 둘 다 이득을 얻는다. 전원우의 사정은 모르지만 나에겐 꽤 큰 이득이었다. 70대, 40대의 할아버지 친구와 삼촌의 경력을 무시하고 올라갈 수 있는 건, 어쩌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대신, 감정은 없겠지만.”

 

 

 

 

 

 

 

 

 

 

 

 

 

 

 

 

 

 

 

 

“지금부터 200X 학년도 새벽 고등학교 입학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드디어 시작인가.”

 

 

이런저런 절차를 끝마치고 난 뒤, 내가 입학 선언문을 대표로 읽을 시간이 찾아왔고, 나는 그 어떤 흠도 잡히지 않기 위해 빳빳하게 다린 교복을 입은 채로 강당 위로 올라갔다. 내가 올라서자 전원우가 설풋 웃어주며 자리에서 물러나 벽에 붙어선 뒤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다음은 신입생들을 대표하여 김민규 신입생이 선언문을 낭독하겠습니다. 재학생들은 시작하기 전과 후에 큰 박수로 환영해 주기 바랍니다.”

 

 

떨리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난 제대로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완벽하게 신입생 선언문 낭독을 끝내고 나서, 전원우가 내게 슬쩍 다가와 말했다.

 

 

“수고했어, 민규야. 연습 별로 안 한 거 치고는 잘 하던데.”

“그야 당연하지. 이제 더 이상 할 거 없지? 난 좀 바빠서,”

“민규야, 당연히 앞으로는 연인으로서 있어야지. 안 그래?”

“뭐...?”

“결혼하려면, 그 루트가 제일 편하잖아.”

“하아...”

“앞으로도, 잘 부탁해.”

 

 

전원우가 싱긋 웃으며 하는 말이 내게는 그저 고역일 뿐이었다. 연인이라니... 별로 가지고 싶지도 않고 나중에 결혼만 하면 되는 건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아,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다?”

“누가 뭐래?”

“그냥 너랑 나랑 사귀면 내가 올라가기 쉬워지고 그래야 너한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그러는 거야. 알겠냐?”

“아, 네네. 그러시겠죠.” 

 

 

우리는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되었고, 둘 다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데이트를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원우한테 집적대는 사람이 나타났다.

 

 

“형, 저 형 좋아해요.”

“... 난 너 안 좋아하는데?”

“저랑 사귀어주시면, 안 돼요?”

“... 내가 왜 좋은데?”

“예쁘고, 잘생겼고, 스펙도 좋으시니까요. 이만한 사람 한국에서 찾기 힘들잖아요.”

“어쩌지, 난 이미 애인이 있는데.”

 

 

데이트하기로 해서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장소에서 전원우가 그 인간이랑 같이 있는 걸 봤다. 왜인지 모르게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고, 다가가서 둘을 떼어놓으려다가 전원우의 마지막 말에 피식 웃으며 멈춰 섰다.

 

 

“내 애인은 너보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매너도 좋고 집안도 좋아서. 너랑 사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대체 선배 애인이 누구신데...”

“1학년에 김민규라고 알려나. 개거든.”

“김민규요...?”

“아 마침 저기 오네, 빨리 와 민규야-“

 

 

바로 달려와 안겨오는 전원우에 심장이 가라앉는 듯 아려왔다. 전원우에게 집적대던 새끼는 나를 보더니 맹수를 본 토끼같이 곧장 도망쳐버렸다.

 

 

“왜 빨리 안 왔어-“

“좋아 보이길래.”

“좋기는 누가, 진짜 너무 싫거든-“

“나랑 있을 때보다 편해 보이던데?”

“질투해?”

“... 아니거든.”

“질투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얼굴에 열이 화르르 올랐다. 보나 마나 얼굴이 벌게져 있을 것이 뻔해서 얼굴을 돌리는데, 전원우가 고양이 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맞는데?”

“... 아니라고.”

“나 좋아하지 마. 좋아해 봐야 쓸데없어.”

“...”

“키스할래?”

 

 

왜일까, 충동적인 그 말이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 되어 나를 얽매었다. 단단한 사탕 같던 그 말은 녹아 나를 둘러쌌고, 그 말은 굳어져 다시 달콤한 사탕이 되었다. 그리고, 그게 우리의 첫 키스이자, 김민규 17년 인생의 첫 키스였다.

 

 

 

 

 

 

 

 

 

 

 

 

 

 

 

 

 

 

 

 

“민규야, 이제 너도 슬슬 결혼을 해야...”

“할아버지, 저 전원우랑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 그게 정말이냐?”

 

 

탐욕스러운 그 눈빛에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할아버지라는 인간이, 전원우를 탐하려 들었다는 얘기는 이미 오래전에 들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저딴 사람이 회장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저질러 버렸다.

 

 

“그래서, 후계자 자리를 저에게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내가 너를 잘 알지. 욕심도 많고 생각도 많은 애가 너라는 걸, 내가 모르겠니. 하지만... 그전에 부회장과 메인 계열사 사장을 설득시키고 오지 그러니?”

“삼촌과 회장님 친구분은 너무 늙으셨습니다. 슬슬 젊은 뇌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민규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경험이 제일 없는 건 너잖아?”

“그 부족을 전원우가 채워줄 텐데, 뭐가 문제죠?”

“전원우가 W 그룹 회장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그걸 어떻게 채울 것이며, 너희는 지금 결혼하기로 한 사이일 뿐이잖니?”

“... 당장 식을 다음 주에 올릴 예정입니다. 이 정도면, 되시겠습니까?”

“... 2년 안에 너가 사장직 이상으로 올라가고, 전원우가 회장이 되면, 내가 바로 너에게 이 회사를 물려주마. 물론, 쉽지는 않을 거다."

“걱정 마시죠, 곧 삼촌 자리는 제 것이 될 테니까.”

“...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그만 나가 보거라.”

“네, 회장님.”

 

 

할아버지는, 내 인생 평생에 없었다. 내가 방금 대화를 나눈 저 늙은 수퇘지는, 나중에 울며 후회하게 될 것이고, 내 말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내 아버지가 그랬듯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겠지.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회장님.

 

 

민규가 피식 웃으며 회장실을 나갔다. 회장은 그런 민규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민규가 회장의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회장은 비서를 호출해 명령을 내렸다.

 

 

“W 그룹의 전원우 알지? 베일 속에 가려진 왕자님 말이야.”

“...이젠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그 애를 내 앞에 좀 데려와 봐.”

“...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자네가 내 손자와 일주일 뒤에 결혼한다는 말은 들었네, 축하하네.”

“... 감사합니다.”

 

 

갑자기 결혼이라니, 예정에 없던 일이긴 했지만 흥미로운 일인지라 원우는 일단 수긍했다.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원우에게 다가갔다. 원우는 예전의 기억 때문에 순간 뒷걸음질 칠 뻔했지만, 꾹 참고 회장의 눈을 응시했다.

 

 

“자네의 그 눈은, 어릴 때든, 지금이든 똑같군.”

“당연하죠, 같은 사람이니.”

“내가 자네를 왜 불렀는지 아나?”

“... 저야 모르죠. 왜 부르셨습니까?”

“역시, 당돌한 것도 똑같군.”

“...”

“그냥, 나한테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불렀네.”

“전 그런 거 없는데요. 아, 하나 있긴 하네요.”

“편하게 말하게.”

“제 말대로, 들어주실 거라는 확신이 아직은 없어서요.”

 

 

원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회장이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뒤 탐욕에 가득 찬 눈으로 원우를 바라보았다.

 

 

“그럼, 딜을 해 볼까.”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는 대신, 회장직을 민규에게 넘겨주십시오. 전 그거면 충분합니다.”

“이번 한 번으로 회장직을 넘기라는 건가?”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회장님께서 그만하자 말씀하실 때까지 하는 걸로 하죠.”

“왜 그렇게 민규의 직급을 높이려고 노력하는 거지?”

“... 전 민규를 사랑하니까요.”

 

 

원우가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회장은 잠시 움찔하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단 민규가 사장직에 오르고, 자네가 회장직에 오르면 바로 넘겨주겠네.”

“... 나쁜 조건은 아니네요, 알겠습니다.”

 

 

 

 

 

 

 

 

 

 

 

 

 

 

 

 

 

 

 

 

“내가 결혼을 다음 주에 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꼬맹아?"

“... 그건 좀 미안해. 근데 그 돼지 새끼가 형한테 집적대는 게 싫었단 말이야...”

“참나, 언제부터 그렇게 날 챙겼다고.”

“피이, 그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예의거든?”

“나 사랑해?”

“...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 사랑하냐고. 그냥 궁금해서.”

“...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이 뭘까 아?”

“나 사랑하지 말라고. 몸까지는 섞어줄 수 있어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건 부담스러워.”

“허, 누가 사랑한대?”

"아니면 말고,"

 

 

전원우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고기를 썰었다. 스테이크는 반으로 갈라지며 육즙을 울컥하고 접시에 내뱉었다. 피와 비슷한 색깔에 난 인상을 찌푸렸다.

 

 

“결혼, 다음 주까지 어떻게 하게.”

“그 계획은 이미 짜 뒀어. 형은 그냥 몸만 오면 돼.”

“참나. 신혼여행은, 갈 거야?”

“가긴 가야지, 후계자 문제도 있고. 삼촌이랑 부회장은 이미 아들이 있으니까.”

“음, 그럼 한 일주일 정도?”

“형이 원하면 더 줄일 수도 있고.”

“줄이는 건 별로고, 늘리는 건?”

“... 좋아하지 말라면서, 나보다 형이 날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뭐래, 내가 어딜 봐서?”

“나랑 더 오랫동안 단둘이 있고 싶다는 거야?”

“... 미쳤냐?”

“신혼여행은 짧으면 짧을수록 이득이잖아.”

“그냥 여행 좀 길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거든!”

“그럼 나중에 혼자 가. 아니면 권순영 데리고 가던가.”

“뭐래, 이번 기회 아니면 여행 갈 일도 없어.”

 

 

전원우가 부드럽게 썰린 스테이크 한 점을 포크로 찍어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오물거리는 그 입술을 보며 순간적으로 아찔한 충동을 느꼈으나, 난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왜 그렇게 봐?”

“예뻐서,”

“... 나 좋아하지 말라니까?”

“누가 좋아한대? 예쁘댔지.”

“하긴, 내가 원래 좀 예뻐.”

 

 

전원우가 싱긋 웃으며 또 한 조각을 입으로 집어넣었다. 난 피식 웃고는 내 몫으로 놓인 스테이크를 부드럽게 썰어 포크로 찍어 전원우 쪽으로 내밀었다.

 

 

“...? 이건 또 뭐야.”

“잘 먹는 거 보니까, 흐뭇해서.”

“참나, 하루 종일 굶었으니까 당연하지. 그리고 다이어트 중이야.”

“뺄 살이 어디 있다고 다이어트를 해.”

“초췌해 보여야 해서,”

“...? 그건 또 무슨...”

“애들은 몰라도 돼~”

 

 

전원우가 하얗고 마른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까지 애 취급할 건데, 하고 짜증을 내면서도 실제로는 짜증 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이상했다. 전원우를 좋아하는 건가 싶을 만큼.

 

 

“평생~”

“어 뭐야, 평생 같이 살 거야?”

“당연하지, 그럼 뭐 내가 너한테 W 그룹 넘기고 이혼할 줄 알았어?”

“아니, 전원우가 그럴 리가. 얼마나 이기적인데.”

“맞아, 난 이기적이지.”

“... 뭐야, 갑자기 왜 진지한 건데.”

“그냥, 내 모든 행동이 너무 이기적인가 싶어서,”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는 내게 그저 설풋 웃어 보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때 처음으로 전원우의 텅 빈 눈동자를 보았다. 그 기이함에 부르르 떠는데, 전원우가 나를 불렀다.

 

 

“민규는 나를 너무 좋아해,”

“...”

“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

 

 

뭐래, 라고 말하려던 나는 전원우의 이어진 말에 입을 다물었다. 마치 곧 있으면 죽을 것처럼 하는 말에 나는 그저 접시 위의 육즙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왜 대답을 안 해 민망하게.”

“형이 내 곁에서 사라지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잡아올 거야. 그리고 만약 형이 나보다 먼저 죽으면,”

“... 죽으면?”

“박태산 죽이고 바로 형 따라서 죽을 거야.”

“그전에 내가 박태산을 죽일 수도 있잖아.”

“형은 박태산이랑 원한 관계 없잖아.”

“있어, 그냥 티를 안 낼 뿐이지.”

“그래...?”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싸할 때 내가 주로 뭐라고 말하더라...? 기억도 잘 안 났다. 나름 화기애애하던 우리 둘 사이의 기류는 냉랭해졌다.

 

 

“나 오늘 일이 바빠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어? 어...”

 

 

알고는 있었다. 전원우는 제가 싫은 것을 회피하려는 기질이 있다는걸. 급하게 일어나는 전원우를 차마 데려다주겠다며 따라나설 수 없었다. 그리고 전원우의 성격상 따라가면 짜증을 낼 것이 분명했다.

 

“하아...”

 

양반은 못 되네, 김민규.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해서는...

 

 

 

 

 

 

 

 

 

 

 

 

 

 

 

 

 

 

 

형 - 폐백은 전부 의례일 뿐이니 스킵하고 결혼만 하자.

 

 

갑자기 날아온 문자에 당황했다. 결혼이 4일도 남지 않은 시점인지라, 폐백 준비에 바쁘던 나였다. 근데 갑자기 폐백을 스킵 하자고...?

 

 

- 왜, 무슨 일인데?

형 - 늙은 돼지 얼굴 보는 횟수 최대한 줄이고 싶어서

    - 그리고 난 시간 낭비하는 거 딱 질색이야.

    - 우리가 서로 마음이 있어서 결혼하는 것도 아니니까,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 음... 알겠어, 일단은.

 

 

일단은 전원우에게 맞춰 주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래서 곧장 폐백을 취소시켰고, 시간은 흘러 결혼식 날이 되었다. 나는 검은색 턱시도를, 전원우는 하얀색 턱시도를 입었고, 우리는 박태산의 주례 아래에 결혼을 했다.

 

 

“형, 수고했어.”

“... 응.”

“형 어디 아파...?”

 

 

열이 있는 건가 싶어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었는데, 전원우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픈 건가...? 전원우의 얼굴이 새빨갰다. 신혼여행 따위야 그냥 미루면 되는 것이니 쉬는 게 나을까 싶어서 전원우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 보는데."

"아픈 건가 싶어서. 그냥 신혼여행 취소할까? 형 아프면 안 가도 되는데."

"... 뭐래, 갈 거거든."

"... 아프면 말하구, 나 형 아픈 거 싫어."

"안 아프거든요, 걱정 하지 마시죠."

 

 

피식- 웃으면서 하는 말에 나는 그저 마주 웃어보일 뿐, 그 외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진 채로, 우리 둘이 탄 차가 출발했다.

 

 

신혼 여행지는 하와이였다. 기왕 가는 거 멀리 가자는 전원우의 완고한 고집 때문이었다.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었기에, 나는 전원우에게 맞춰주었다.

 

 

생각보다 신혼 여행은 그리 재밌거나, 신나거나, 즐겁지 않았다. 그저 단조로울 뿐, 다른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전원우도 마찬가지인지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냥 호텔 빨리 갈까?"

"그게 좋을 것 같은데, 나 너무 지루해."

"글치, 나도 그렇더라. 그냥 호텔 가서 쉬기나 하자."

 

 

민규와 원우는 잡혀 있던 여행 스케줄을 전부 다 취소해 버린 뒤 바로 민규가 예약해 둔 호텔로 향했다. 생각보다 도심에 있고, 꽤 고층이라 찾기 쉬웠다. 체크인을 하고, 둘은 곧장 11층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높은 층은 아니었지만, 둘 다 경관을 보려고 호텔로 온 것은 아니기에 상관하지 않았다. 둘은 저들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당황했다.

 

 

"... 이거, 너가 예약했댔지."

"... 응, 그런데 나도 이게 이런 걸 줄은..."

 

 

왜일까, 둘의 방은 분위기가 굉장히 야릇했고, 침대는 순백의 이불로 뒤덮여 있었으며, 이불의 한가운데에는 장미 꽃잎이 하트 모양으로 흩뿌려져 있었다. 민규는 굉장히 짜증이 나 보이는 원우의 눈치를 보면서 어... 나 씻고 올게? 라 말하며 도망가 버렸다.

 

 

"하아..."

 

 

원우는 오늘따라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루한 여행 일정, 바라지도 않던 야릇한 분위기, 그리고 결혼식 주례를 보며 저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박태산까지, 원우에게 지금 짜증나지 않는 것은 유일하게도, 그리고 의외로 민규였다. 지루한 게 눈에 보이는 데도 눈치를 보며 신난 척 하는 것도 귀여웠고, 호텔로 가자 말하자마자 눈을 빛내는 것도 굉장히 귀여웠다. 원우는 피식 웃곤 짐을 내려놓았다. 좀 이따가 무슨 일이 벌어질 지, 그도 굉장히 궁금했다.

 

 

 

 

 

 

 

 

 

 

 

 

 

 

 

 

 

 

 

 

"꼬맹아, 뭐해?"

 

 

민규가 씻고 나온 뒤 원우는 곧장 씻으러 들어갔다. 그 사이에 민규는 원우가 혹시나 장미 꽃잎 때문에 짜증이 날까 봐 장미 꽃잎을 전부 다 바닥으로 내려놓고, 내려놓는 와중에 흐트러진 꽃잎의 배열에 이걸 그냥 버려야 하나 모아서 한 군데에 모아두어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마침 원우는 씻고 나왔고, 원우는 흰 샤워가운을 입고 열심히 고민 중인 민규에게 말했다.

 

 

"이씨, 꼬맹이 아니거든!"

"발끈하는 거 보니까, 맞는데."

"아니라고!"

 

 

민규가 그저 어린애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원우를 노려보다가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목을 붙잡고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원우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이며 민규를 올려다보았고, 민규가 낮게 그르렁대며 말했다.

 

 

"아닌 거, 보여줄까?"

"... 보여줄 것도 없잖아?"

"그럼 하고 나서도, 그 얘기 하나 보자."

"악, 미친 놈아!"

"형이 자극했다, 난 잘못 없어."

 

 

민규가 싱긋 웃으며 원우의 샤워가운 끈을 잡아당겼고, 원우는 순식간에 나체가 되었다. 원우가 당황하면서 민규를 밀어내었지만, 민규가 원우에게 밀려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둘의 밤이 깊어졌다.

 

 

 

 

 

 

 

 

 

 

 

 

 

 

 

 

 

 

 

 

"회장님, 이제 약속을 지키셔야죠?"

"그 전에,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지?"

"죄송하게도, 전 이미 임신을 해 버려서, 불가능하겠는데요."

"그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 오지 않는 게 좋으실 텐데요."

"자네는 이미 나와 거래를 했어, 안 그런가?"

 

 

회장이 원우에게 다가왔다. 원우가 굳은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회장이 원우의 옷을 강제로 벗기려는 순간, 찰칵- 소리가 나며 회장이 앉아있던 소파 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당황한 회장에게 원우가 그 특유의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박 회장님, 많이 놀라셨나 봐요?"

"... 권 기자, 이게 무슨..."

"안녕하세요, 앞으로 일보 소속이자 W 그룹 전속 기자인, 권순영입니다아~"

"지금 전원우 네가 날 속인...?"

"이제, 민규를 회장으로 올려주시죠. 박민규가 아닌, 김민규 말입니다."

"... 네가 감히 날 속여?"

 

 

회장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원우를 쳐다보았다. 원우가 개의치 않고 순영에게 손을 내밀자, 순영이 카메라를 원우에게 건넸다. 원우가 순영이 찍은 사진들을 살피더니 다시 순영에게 카메라를 건네곤 생글거리며 웃었다.

 

 

"제가 요청하는 것만 들어주시면, 이게 기사로 나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

"... 김민규에게 회장직을 물려주지, 그럼."

"잘 생각하셨어요. 순영아, 지워."

"지우라고...?"

"아, 일단 회장님이 인사 이동 공지 먼저 하시면."

 

 

회장이 이를 뿌드득 소리가 나게 갈며 컴퓨터로 다가가 인사 이동을 공지했다. 원우는 인사 이동 공지가 확실하게 올라간 것을 확인한 후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지웠다. 순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원우를 쳐다보았으나, 원우는 개의치 않고 회장실을 나갔다. 순영이 원우를 쫓아와선 말했다.

 

 

"조심해, 박태산 회장은 살인 청부 업체 쪽에 연관이 많이 되어 있어. 심지어 자기 친구도 죽이려고 했던 작자라고."

"그래봐야, 이젠 돈만 많을 뿐, 그 어떤 권력도 없지. 그 전에 내가 죽이면 그만이야."

"... 너가 사람을 죽여?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아는 전원우는-"

"네가 아는 전원우랑 실제 전원우는 달라."

"... 왜 그렇게 김민규의 승진에 집착하는 거야? 사랑해서라기엔, 네 성격에..."

"김민규를 사랑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냥... 아저씨랑 아주머니의 복수랄까."

"박준기 사장님이랑 김민아 부사장 님이 네 지지기반이긴 했지만... 그럴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잖아."

"내 생명의 은인이셔, 말 조심해."

"...알겠어."

 

 

원우의 얼굴은 까칠해 보였고, 지금 그의 심기를 건드리면 폭발할 것만 같았기에 순영은 조용히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 근데, 애 임신했다는 거. 진짜야?"

"응, 진짜야."

"전원우 진짜 달라졌네. 마음도 없이 하는 게 가능하다니."

"... 김민규랑 박태산은 다르니까. 그런데 이제 좀 가지. 나 좀 바빠서."

"... 너 진짜 괜찮겠어...?"

"응. 박태산 그 돼지새끼 그렇게 생각 없지는 않아. 그러니까 이제 가. 형은 괜찮다-"

"형은 개뿔, 그럼 난 이만 간다. 몸 조심 하고-"

"응. 제발 좀 가라."

 

 

원우의 말에 순영이 장난스럽게 웃어보이며 제 갈 길을 갔고, 원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밖으로 나가 준비되어 있는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회장님...?"

"아, 나 회장이죠. 요즘 들어서 회장이 안 익숙하네. 아무래도 회장 일 내려놓아야 하나 봐요."

"에이, 그래도 그러시면 안 되죠. 일 하나는 잘 하시잖아요."

"... 그런가요,"

"네. 그래서, 어디로 모실까요?"

"XX 봉안당으로 가주세요. 오늘따라 아저씨가 보고 싶어서."

"... 네."

 

 

원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운전 기사는 저절로 입을 다물었다. XX 봉안당은, 민규의 아버지이자 전 M 그룹 사장인 박준기의 유골이 있는 곳이었다. 도서관 같이 생긴 그 봉안당은, 희한하게도 책 속에 유골함이 담겨 있는 구조였고, 원우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익숙하게 박준기의 유골함이 들어있는 책을 찾아 걸어갔다. 원우가 책을 뽑아 펼쳤다. 고 박준기. 이 네 글자가 원우의 눈에 들어와 그를 아프게 했다. 원우의 요청으로 봉안당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원우는 책을 소중하게 제 품에 안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오늘따라, 그의 따뜻하던 말이 그리웠다.

 

 

"... 아저씨 어떡하죠, 저 아저씨 아들 좋아하나 봐요."

 

 

당연하게도, 그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원우가 안경을 벗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두 개의 감정이 혼돈되어 원우의 머리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박준기를 동경하고 한편으로는 사랑했던 마음과, 김민규를 사랑하는 마음이 서로 부딪히며 박준기를 향한 마음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원우는 이 상황이 싫었다. 내가 20년 넘게 동경하고 사랑했던 마음이, 고작 10년도 안 되어서 사라지려고 한다니, 그저 슬플 뿐이었다.

 

 

"아직도 아저씨가 좋은데... 민규 애를 임신해버렸어요... 어떡해요...?"

 

 

원우가 제 배를 매만지며 말했다.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배는 아직 홀쭉했다. 원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두 감정을 통제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젠 박태산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했다. 순영의 말대로, 박태산은 위험한 사람이었으니까.

 

 

"전원우, 여기 있을 줄 알았지."

"... 회장님, 아니. 전 회장님. 여긴 무슨 일이세요?"

"널 좀 만나려고 왔지."

"... 전 이제 더이상 당신을 만날 이유가 없는데."

"각오도 없었던 건가, 내가 아는 그 약삭빠른 전원우랑은 다른데."

"... 지금 당신 상대할 기운도 없으니까 가시죠."

"울고 있었나?"

"그게, 당신 알 바는 아니잖아. 가라고."

 

 

원우가 벌게진 눈으로 박태산을 쳐다보았다. 박태산은 원우의 벌건 눈을 힐끗 쳐다보다가 원우의 품 속에 있는 박준기의 유골함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원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유골함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았다. 박태산이 떠나려는 원우에게 말했다.

 

 

"아직도, 내 아들을, 좋아하는 건가."

"... 상대할 가치도 없는 것 같은데, 굳이 대답해야 하나?"

"이 사실을 내 손자가 알게 되면 꽤나 슬퍼할 것 같아서 말이지. 안 그래?"

"..."

"아, 이미 알고 있나? 알고도 둘이 한 건가?"

"..."

"그런데 어쩌지, 임신은 취소시켜야 겠는데."

 

 

박태산이 대꾸도 없는 원우에게 다가가 원우를 잡아 벽 쪽으로 던지듯이 밀쳤다. 악, 원우는 배를 손으로 문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피가 흥건하게 배어나왔다. 마침 그 모습을 목격한 운전 기사가 급하게 원우에게로 달려왔다. 괜찮으.... 기사가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원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김민규."

"무슨 일이세요, 삼촌?"

"회장 자리를 내 놔."

"... 삼촌."

"이 자리는, 원래 내 것이었어야 해."

"그러니까, 왜 이게 삼촌 거라는 건데요?"

 

 

삼촌이 내 명패를 탐욕스럽게 쳐다보았다. 머리가 벌써부터 지끈거렸다. 회장직 오른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찾아오는 삼촌이 어이가 없었다. 어차피 박태산만 죽이고 나면 본인에게 돌아갈 텐데, 왜 그리 집착하는 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 타이밍에 전화벨이 울렸다.

 

 

"후... 삼촌, 잠깐만요."

[회장님, 사모님꼐서 방금 병원에 실려 가셨습니다.]

"... 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원우야, 전원우, 대체 왜 병원에 실려간 건데. 어디가 아픈 건데, 저에게 보고가 들어올 정도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앗다. 삼촌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 기쁘면서도, 전원우가 걱정되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전원우, 아프다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응, 민규 왔어?"

"... 형, 왜 아픈데?"

"네가 안 아프면 된 거야."

"형, 왜 이래 진짜."

 

 

전원우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그의 행동가지 하나하나가 마치 실에 옭아매어져 있는 꼭두각시 인형이 곧 실이 끊어질 것만 같이 불안해 보였다. 그럴리가 없는데, 전원우는 한 없이 자기중심적이고 이해타산주의인데, 그 누가 그를 조종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형, 일단 누워서 자. 자고 나서, 그때 좀 안정이 되면-"

"안정할 일도 없고, 난 정상이야."

 

 

...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이라고 이어진 전원우의 말에 나는 저절로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전원우, 심각하게 아픈 거, 아니지, 안 아프지, 제발 안 아프다고 말해.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눈에 비친 걸까, 원우가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난 괜찮아. 가서 너 할 일 해."

"... 난 형이 아프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

"나도 네가 아프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

 

 

전원우는 웃고 있으면서도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정작 그의 눈은 서릿발에 꽁꽁 얼어버린 얼음 같았다. 원우를 옭아맨 실을 끊어주고 싶으면서도 그로 인해 그가 넘어지게 될 것이 두려웠다.

 

 

"이제 가서 너가 할 일을 해, 난 안 아프니까."

"...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아마, 도."

"... 내 수행비서 두고 갈게.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안 돼, 너도 필요하잖아."

"나보다 형이 더 중요해."

"... 날 사랑해?"

 

 

... 또다. 나를 사랑하느냐는 그 질문.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사랑하지 말랬으니 거짓을 말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 기회에 내 마음을 제대로 고백하며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사랑해 형, 이라고 말하면, 너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되고, 너는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난 너 안 사랑해. 그러니까, 괜한 기대하지 마."

"... 누가 사랑한대?"

"그냥, 알아두라고."

"괜한 걱정하지 마. 내가 형을 사랑할 일은... 없으니까."

 

 

내가 내뱉었지만 진짜 매정했다. 아니 왜 사랑하지 말라면서 그런 표정인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 키스 한 번만 해주면 안 돼?"

 

 

 

고양이마냥 올려다보는 그 눈 속으로, 난 빠져들어 버렸다. 아픈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다 전원우가 야한 탓이었다. 질척하게 내 혀를 옭아매는 그 혀는 나를 옭아매었고, 전원우를 옭아매던 보이지 않는 실이 나에게도 다가와 나도 얽어매는 듯 했다.

 

 

"..."

"..."

 

 

한바탕 질척한 키스가 끝나고, 전원우는 나를, 나는 전원우를 쳐다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다시 서로에게 얽혀가며 우리는 서로에게 다시금 빠져들었다. 급한 손이 전원우의 바지 버클 쪽으로 향하는데, 전원우가 그 손을 쳐냈다.

 

 

"...왜...?"

"키스, 만 해달라고 했던 거, 였는데."

 

 

숨이 차는지 얼굴이 발개져 헉헉 거리는 전원우는 너무나 야했다. 내 간절한 눈빛에 못 이기는 척 전원우는 허락을 내렸고, 우리는 매우 질척하고 뜨거운 밤을 보냈다.

 

 

 

 

 

 

 

 

 

 

 

 

 

 

 

 

 

 

 

 

"전원우, 난 이만 가볼게. 저녁에... 올까?"

"오지 마, 또 어떤 짓을 하려고?"

"형이 좋아할 짓?"

"장난 아니야. 오지 마, 한 달 정도."

"... 왜 한 달이야, 안 아프다며."

"그냥, 점점 기업일에서 손 떼려고. 너한테 주려면, 구실이 필요하잖아."

"... 진짜 구실인 게 맞아?"

"김민규, 날 통제하려는 거야?"

"그럴 리가."

"아무리 형이 그리워도, 오지 마. 알겠어?"

"...알겠어."

 

 

김민규가 떠났다. 병실을 꽉 채우는 듯이 보이던 대형견 한 마리가 사라지고 나니, 나 홀로 서 있는 병실이 너무나 넓고 쓸쓸하고, 조용했다. 수행비서라는 사람은 밖에 있었고, 내가 치료를 모두 거부했기 때문에 의사나 간호사들도 없었다.

 

 

"... 어떡하지..."

 

 

나 진짜로 김민규 좋아하나 봐... 애써 말을 삼키며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난... 그저 아저씨 때문에... 아저씨를 위해서... 그리고 아저씨의 복수를 위해서... 그것 때문에 김민규를 회장으로 만들었는데, 아저씨.. 나 너무 허무해. 내 일생의 목표였던 게, 이뤄지니까, 이젠 내가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이유를 모르겠어...

 

 

 

 

 

 

 

 

 

 

 

 

 

 

 

 

 

 

 

 

"... 수행 비서님, 잠깐 와주세요."

"무슨 일이십니까, 사모님."

"... 제 변호사 좀 불러주세요. 민규한테는 비밀로 해 주시고요."

"변호사는 왜 만나시려는 겁니까?"

"다 이유가 있어요."

 

 

내가 해사하게 웃어보이며 말하자, 수행 비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행 비서가 나가자마자, 갑자기 서러워졌다. 나는 널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심지어 내가 너로 인해 생긴 애가 너의 할아버지에 의해서 죽었는데, 빈말이라도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는 없는 거냐고. 아무리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은혜를 갚는 과정이라고 해도, 나는 이제 점점 내 인생의 목표가 사라져가서 목표를 이루는 그 순간 죽어버리고 말텐데, 조금만 더 다정해질 수는 없는 거냐고.

 

 

"...민규야."

 

 

핏기 없는 얼굴로 원우는 민규의 이름을 중얼거리듯이 내뱉었다. 민규야, 민규야. 정신이 나가버린 듯, 혼이 나가 버린 듯, 무기력하고도 기이했다. 원우는 무기력하게 피식- 웃으면서 핸드폰을 집어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권순영, 잠깐 M 그룹 산하 병원 1인실, 그러니까 1123호로 와."

[...? 뭐 취재 거리라도 있냐?"

"... 취재 거리라면, 취재 거리지."

[뭐야 그게,]

"빨리 와. 기다릴게."

 

 

원우가 순영이 대답할 틈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곧 죽을 거라는 건, 의사가 말하지 않아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죽기 전에, 목표는 꼭 이뤄내야 했다. 안 그러면, 원우의 삶은 이루어낸 것도 없이 끝나버릴 테니까.

 

 

 

 

 

 

 

 

 

 

 

 

 

 

 

 

 

 

 

 

[야, 전원우. 도착했는데, 왜 이지훈이 문 앞에 있어?]

"둘이 같이 들어 와. 할 말 있으니까."

 

 

곧이어 병실의 문이 열리고, 1인실 안으로 순영과 지훈이 들어왔다. 둘 다 초췌한 원우의 모습에 기겁했다. 둘이 서로를 쳐다보았다가 원우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얘들아."

"어,"

"어?"

"나, 곧 죽어."

"뭐?"

"... 뭐?"

"박태산 그 개새끼가, 임신했을 때 나를 뒤로 밀쳐서 벽에 세게 부딪혀서, 애가 죽었거든?"

"..."

"근데 그 뒤로 혹시나 해서 검사란 검사는 다 받았는데, 말기 암이래. 믿겨져?"

"미친..."

"그래서, 유언장도 쓰고, 권순영 기삿거리 좀 주려고 둘 불렀어."

"... 원우야, 치료는 안 받아...?"

"안 받아. 더는 살 생각도 없고, 목표도 거의 다 이뤘으니까, 살 의지도 없어."

"...김민규 좋아하잖아, 아니야?"

"난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아니, 좋아할 수 없어. 나는... 알잖아."

 

 

원우가 설풋 웃어보였다. 원우가 어린 마음에 마음에 품었었던 사람이 있었다. 사교 파티에서 만났었고, 그 사람은 9살 짜리 아들과 3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아내가 있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원우를 잘 챙겨주었다.

 

 

"... 고 박준기 사장님을 아직도... 좋아하니까."

"전원우, 벌써 20년도 더 지났어. 이제는... 잊을 때도 됐잖아."

"... 모르겠어. 사실은, 김민규도 좋아하긴 해. 그런데... 이게 박준기 사장님을 좋아해서 그거에 영향을 받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원우야,"

"... 됐어, 빨리 유언장이나 쓰게 종이 좀 줘. 내가 쓸게."

"불러, 내가 받아적을 테니까."

 

 

지훈은 손에 힘도 안 들어가 펜을 집어들고도 떨어트려버린 원우에게 단호하게 대답하면서 펜을 뺏었다. 원우가 말라 갈라진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이며 유서의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W 그룹의 모든 지분을 M 그룹에 귀속시키고, 개인적인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한다."

"... 또?"

"그거 외에는 없어. 아 그리고, 편지도 받아적어 줄래?"

"... 웬 편지?"

"이제 죽을 때까지 민규 못 봐. 그래서, 내가 죽으면 편지 좀 전해달라고."

"... 불러, 적을게."

"고마워, 지훈아."

 

 

원우가 싱긋 웃으며 지훈이 새 종이를 꺼낼 때까지 기다리며 천장을 응시했다. 병실이라기엔 너무나 화려하게 매달려 빛나는 샹들리에에 원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화려한 것도, 죽음 앞에선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았다.

 

 

"민규야, 나 사실 말기 암이래. 그래서, 살 수 있는 날이 1주도 안 남았대."

"..."

"그리고 병원에 실려왔는데, 인생이 다 부질 없더라."

"..."

"사실 나 너 사랑해. 나를 사랑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사실 네가 날 사랑해주길 바랬어."

"..."

"나 진짜 이기적이다, 글치?"

"..."

"근데 난 다 널 위해서 그랬어. 날 좋아하면, 네가 얻을 이익은 없으니까... 난 널 어떻게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거든."

"..."

"미안, 회장 죽이고 나면 같이 귀농하자고 했던 약속, 못 지키겠다. 미안해."

"..."

 

 

원우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순영이 놀라서 야, 너 울어...? 하고 질문하는 것을 무시하면서 원우가 잠시 숨을 골랐다. 벌써부터 숨이 차는 게 점점 죽어가는 것만 같아 순영과 지훈이 원우에게로 급하게 손을 뻗었다.

 

 

"항상, 사랑해. 근데 진짜 찾아오지 말랬다고 삼 주 동안 한 번도 안 찾아오더라."

"..."

"내 방에 있는 베개 밑에 있는 편지도... 꼭 봐줘."

"..."

"... 끝이야."

"... 전원우."

 

 

지훈이 편지를 다 받아 적은 뒤 편지를 편지 봉투에 넣고 원우를 불렀다. 원우의 눈엔 초점이 없었다. 그저 눈물만 당연하다는 듯이 흘릴 뿐, 잠깐 동안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전원우, 정신 차려. 너 왜 이래."

"... 나 죽고 장례식 준비는 니들이 해줘."

"... 원우야, 왜 이래 진짜."

"그리고 민규한테는 나 죽은 거 알리지 마. 알려도 장례식 끝날 때까지는 알리지 마.'

"왜...?"

"그 애가 내 걱정을 하지 않고 무사히 W 그룹을 차지했으면 좋겠어."

"... 그럼 유언 집행은 어떻게 해."

"내가 W 그룹의 지분을 모두 넘겼다는 문서를 만들어서 가져다 줘."

"... 알겠어."

"날 만나고 싶어하면, 오지 말라고 막아주고."

"... 너 진짜 철저하구나... 근데 나는 왜 불렀어?"

"나 죽으면 기사 나는 거 막고, 김민규 알게 되면 그 때 투병 중 사망 기사 내라고."

"... 근데 원우야, 넌 김민규가 안 미워?"

"미울리가."

"... 안 오고 있다며, 삼 주 동안."

"그건 내가 오지 말라고 막았으니까..."

"..."

"수행비서는 민규한테 전하지 말라고 입 막아. 나... 곧 죽을 것... 같아서..."

 

 

원우의 말에 지훈과 순영이 깜짝 놀라선 원우를 쳐다보았다. 원우의 손이 원우의 입을 막았고, 원우가 쿨럭거리면서 기침을 하자 죽은 피가 원우의 손에 묻어 원우의 하얀 손을 검붉은 피로 물들이고 그의 팔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

 

 

"... 난 행... 복하다고... 결국 나한테는 이.. 게 해... 피 엔딩... 이라고..."

"원우야, 왜 그래..."

"전원우, 정신 차려, 제발!"

"민규... 한테... 전해..."

 

 

원우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그의 몸이 차갑게 식었다. 순영과 지훈이 당황하면서 원우를 쳐다보았다. 순영이 원우의 얼굴을 만져 확인했다. 더이상 원우에게선 사람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원우는... 결국 죽었다.

 

 

 

 

 

 

 

 

 

 

 

 

 

 

 

 

 

 

 

 

"오늘 식사는 어떠셨습니까, 회장님."

"맛있었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혹시 아까 에피타이저로 나온 애플 파이 몇 개 좀 싸주실 수 있을까요? 제 남편이 아파서 뭐라도 먹이고 싶어서."

"얼마든지 되죠. 회장님 남편 분을 되게 사랑하시나 봐요."

"네, 뭐 그렇죠, 하하."

 

 

이거라도 전해줘야 전원우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이 한 달이 되기 하루 전이니, 이거라도 먹으라며 찾아가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번에 애플파이를 맛있게 먹던 게 아직도 눈에 아른아른 거렸다.

 

 

"아, 잠시만요. 전화 좀 받고요."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이지훈...? 아, 원우 형 변호사였던가. 나는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야, 너 지금 어디야.]

"거래처 미팅. 근데 그 쪽이 무슨 상관이신지."

[원우가 너한테 W 그룹 지분 넘기라고 해서, 처리할 문서 몇 개 있는데.]

"오늘 원우 형 찾아갈 예정이니까 그때 해."

[원우가 너한테 오지 말래. 오면 연 끊어버리겠다던데.]

"... 그럼 그 쪽이 올 거야?"

[응, 1시 쯤 찾아갈게. M 그룹 본사로 가야하는 거, 맞지?]

"응, 데스크로 가서 이지훈이라 하면 안내해 줄 거야."

 

 

지훈이 그 말에 곧장 전화를 끊어버렸고, 민규는 갑자기 솟아오르는 짜증에 씨발, 하고 욕을 내뱉었다. 민규를 쳐다보고 있던 거래처 회장이 불안한 눈빛으로 민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무슨 일... 있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셔서..."

"아, 별 거 아닙니다."

"애플 파이는 여기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민규가 차로 향하며 왼손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 속을 파고들어 아릿한 고통을 남겼지만, 민규는 신경쓰지 않았다. 차에 오라탄 민규는 빠르게 엑셀을 밟아 운전하기 시작했다. 운전 기사 보고 오지 말고 쉬라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민규는 빠르게 본사로 향했다.

 

 

"씨발, 지가 뭔데 전원우 말을 전하고 지랄이야."

"... 회장님, 긴히 드릴 말씀이..."

"이따 얘기하죠. 지금 급해서."

"... 네,"

 

 

민규는 원우의 병원에 있어야 할 수행 비서가 왜 여기 왔는지, 이상함을 느끼고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원우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다는 흥분감과 지훈에 대한 짜증에 가득차 최고층으로 향하는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회장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더니, 소파에 지훈이 앉아 있었다.

 

 

"빨리 하고 나가."

"... 너 아직도 모르냐?"

"뭔 개소리야, 이건 또."

"... 아니다, 빨리 처리하고 나갈게. 이거, 싸인해."

 

 

이지훈이 서류를 꺼내 건넸고, 나는 그걸 받아 샅샅이 훑었다. 내게 손해가 되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득이라면 더 큰 이득이었다. 이지훈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난 개의치 않았고, 서류에 싸인을 다 한 뒤 이지훈에게 건넸다.

 

 

"... 이만 가 볼게."

"아, 잠깐만."

 

 

갑자기 아까 싸 온 애플파이가 생각 나 애플 파이가 들어있는 박스를 이지훈에게 건넸다. 이지훈이 이게 뭐냐고 물어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애플 파인데, 원우 형 좋아하잖아."

"... 아, 그렇지."

"이거 전해줘. 혼자 있다고 식욕도 없어서 식사 또 거르고 있을까 봐 걱정되서."

"... 바보 새끼."

"... 응...?"

"못 전해줘. 전원우는..."

"...?"

"...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 원우, 죽은 지 벌써 일주일 정도 지났어."

"..."

"장례식장은 W 병원 지하에 있으니까, 오늘 꼭 오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

"그리고, 원우가 전하라고 했던 거."

 

 

이지훈이 탁자에 편지 봉투를 툭 던진 뒤 회장실을 나가버렸지만, 잠시 사고 회로가 정지했었던 나는 이지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가... 죽어...? 이 생각만 머리속에서 계속 하고 있을 뿐이었다.

 

 

"... 전원우가, 죽었다고."

 

 

들고 있던 애플 파이 박스가 바탁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아는 전원우는, 절대 이렇게 죽을 인간이 아니었다. 이렇게, 죽을 인간이, 아니라고. 곧장 문을 벌컥 열고 밖에 서 있던 수행 비서의 멱살을 붙잡았다. 수행 비서는 매우 놀란 듯 보였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전원우가, 죽었다는, 헛소리가 들리는데, 당장 전원우 있는 병실로, 가지."

"... 회장님, 사모님께선..."

"안 죽었어, 분명 연기거나 이지훈이랑 권순영이 빼돌린 게 분명해."

"... 회장님, 사실입니다."

"전원우가 있는 병실로 가자고!"

"... 네."

 

 

나도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내가 미친 것 같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전원우는, 이렇게 쉽게 죽을 인간도 아니고, 그렇게 나약하지도 않았다. 편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니, 일부러 배제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거다. 편지 안에 정말로 죽었다고, 쓰여 있을 것 같아서, 겁이 나서 도저히 읽을 수도 없었다. 곧장 수행 비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M 그룹 산하 병원으로 향했다. 1123호, 전원우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제발, 제발 1123호에 전원우가 누워 있기를, 날 보자마자 왜 벌써 왔냐고 짜증이라도 내기를, 나는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그곳은 텅 비어 황량했고, 전원우를 상기할 수 있는 물건들, 흔적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왔어? 라고 일어나서 날 반겨주는 전원우가 보이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눈을 비비자, 그 환상마저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결국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회피하려던 현실이 내 눈 앞에 들이밀어지는 것은, 상당히 큰 충격이 되었다.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수행 비서가 다가와 말했다.

 

 

"... 사모님의 장례식장으로.. 모실까요...?"

"... 그래."

 

 

수행 비서의 손에 이끌려 W 그룹 산하 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정말로 전원우의 영정 사진을 보게 된다면, 죽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복수를 해야 하니 죽을 수는 없었다.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서면서 순간 주저앉아버릴 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 주저앉아 울고만 있기엔 주변의 시선이 너무 많았다. 애써 눈물을 참아내려 했지만, 사실 눈물이 나오려고 하지는 않았다.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 독한 새끼,"

 

 

이지훈이 중얼거리는 걸 들었지만, 할 말은 없었다. 내가 봐도 맞는 말이었다. 권순영과 이지훈이 아니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지만, 딱히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나를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게 더 이상했으니까. 나는 밤이 되어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이지훈과 권순영은 장례식장을 떠나지 않았다. 전원우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사랑해, 원우야. 전원우, 내가 미안해... 너가 이렇게 된 것도 모르면서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미안해..."

 

 

끝까지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화장을 하는 건 보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로 실감이 난다면, 그 즉시 나도 죽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그저 난 어두운 장례식장 밖으로 걸어나갈 뿐이었다.

 

 

"... 갈 거냐?"

"... 응,"

"너는 사람 새끼냐? 전원우가 널 얼마나..."

"... 내가 화장 하는 것 까지 보면, 미쳐 버릴 것 같아서."

"너는 사람도 아니야. 눈물 한 방울도 안 나오냐? 결혼한 지 1년도 안 됐다지만, 이건..."

"... 그거 알아?"

"... 뭘,"

"우리, 일주일 뒤에 결혼 1주년이다?"

"... 그래서."

"결혼 1주년 기념 선물은 줘야지, 그거 준비하러 가려고."

"... 뭔 소리야 그게, 미친 거 아니야? 내 말 이해 못 했어?"

"이해 완벽히 했어. 이제 나한테는 신경 끄는 게 좋을 거야, 이지훈. 이젠 내가 어떻게 될 지..."

 

 

나도 모르거든.

 

 

 

 

 

 

 

 

 

 

 

 

 

 

 

 

 

 

 

"회장님, 오늘 일정은-"

"응? 다 취소해. W 그룹 합병 관련으로 할 일이 많아서."

"... 알겠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라는 수행 비서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번에는 그냥 M 그룹 회장 직책 내놓으라고 오시더니, 이제는 W 그룹까지 탐내시려는 건가. 어차피 삼촌한테 돌아가게 될 텐데, 왜 이리 욕심이 많은지. 혀를 차면서 거부의 의사를 보이자, 수행 비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잠시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저 인간은 전원우가 죽은 걸 알려주지 않았다. 좆같네, 이렇게 권력이 없어서야, 회장이라 불리기도 힘들겠는데.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리다가 책상 한 켠에 놓여 있는 전원우의 사진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좀만 기다려 원우야, 내가 곧... 너한테 갈게.

 

 

"..."

 

 

탁자 위에 아직도 놓여있는 전원우의 편지를 감히 펼쳐볼 용기는 없었다. 변명도 듣고 싶지 않았고, 난 아직도 전원우가 죽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종종 이지훈과 권순영이 전화 또는 문자로 일에 미친 새끼라고 욕해댔지만, 나야 뭐 상관 없었다. 일에 미쳐서라도 전원우를 잊으려고 노력해야 했으니까, 안 그랬다간 당장 박태산을 죽이고 감빵에 가게 될 지도 몰랐다. 벌써부터 그래선 안 됐다. 편지고 뭐고, 내일 읽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내일은 대망의 결혼 1주년 날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나는 회장실 의자에 앉아 밀린 일들과 W 그룹 관련 일들, 회장직 양위 관련 일까지 전부 다 처리했다. 수행 비서에게 회장직 양위 문서를 건네자, 수행 비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난 딱히 개의치 않았다.

 

 

"아저씨도 고생하셨어요, 지금 보는 게 마지막이겠네요."

"... 회장님."

"삼촌도 아빠 동생이니까 너무 미워하진 마시고요."

"... 하지만 이건..."

"원래 계획했던 일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요. 저는 이만 갑니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편지 봉투를 조심스레 집어들고 넥타이를 풀며 회장실을 나왔다. 삼촌이 내게로 다가왔다. 또, 또 회장직을 내놓으라고 찾아온 거겠지. 뭐, 맨날 똑같은 소리만 해대니 지겹기만 할 뿐, 별 다른 반응을 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내게 다가오는 삼촌을, 나는 무시하고 회사 밖으로 나갔다. 차에 올라타 우리의 집으로 향하며 편지를 손에 꽉 쥐었다. 열어봤는데, 날 원망하는 말만 있으면 어쩌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말들이 써 있으면, 어떡하지, 원우야. 나는 너무 무서운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색하게 비밀 번호를 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집에 안 온지 벌써 3달이 넘은 것 같은데, 그런 것 치고는 쌓여 있는 먼지의 양이 적었다. 전원우가 청소했던 건가. 갑자기 눈물이 나려는 걸 애써 삼키며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아 편지 봉투를 열었다. 정갈한 전원우의 글씨체가 아닌, 이지훈의 글씨체로 편지가 쓰여 있었다. 대필했나, 이 생각만 들 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편지를 읽어내려가며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내 자신을 너무 죽이고 싶었다. 감정 표현에 서투른 것을 잘 알면서도, 전원우의 표면에 드러나는 말들을 전부 믿었었다. 너 나빴어, 하고 원망 어린 전원우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 하.."

 

 

정신이 혼미해 일어설 힘도 없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원우의 침대가 있을 원우의 방 쪽으로 향했다. 베개 밑에는 정갈한 원우의 글씨체로 쓰인 편지가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들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민규야, 안녕? 편지 쓰는 건 또 오랜만이네. 아, 처음인가? 근데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기고, ... 사실 너가 몰랐던 사실이 있어. 나 너 애 임신했었어. 그리고...

나는 너가 9살 때 너를 처음 만났어. 너는 기억 못할 수도 있지만, 아주머니랑 아저씨가 나를 아들처럼 여기셨고. 그런데 있잖아...

나는 아저씨... 그러니까 너희 아버지를 좋아했었어.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나는 아저씨를 잊을 수가 없었는데... 우리 학교 신입생으로 아저씨 아들이 들어온다길래... 바로 입학 선언문을 구실로 널 찾아갔었어...

근데 생각보다도 더, 아저씨랑 너랑 닮았더라. 놓칠 수가 없었어. 그리고 10년 정도 알고 지내니까, 점점 너가 좋아지는데 그게 아저씨를 좋아해서 그 영향인지, 아니면 너만 좋아하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아저씨 찾아갔었는데, 박태산을 만났어. 그리고 나는 진짜 죽을 것 같았어. 사실... 너 회장 만들려고 박태산이랑 딜을 하나 했었거든, 나한테 몸을 대달라더라. 그러면 넘겨주겠다고.

그래서 권순영 불러서 막아버렸어. 근데, 그 다음에 바로 아저씨 찾아가서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박태산이 와서 나를 벽으로 세게 밀쳤어. ... 그것 때문에 유산이 됐고, 몸 검사 하던 도중에 말기 암이라고 해서, 솔직히 살아갈 생각이 없었어.

치료도 다 거부하고... 그랬었는데 잠깐 너 보니까 생각이 바뀔 뻔했어. ... 사랑해, 민규야.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원우도, 원우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따위로 대꾸하고, 반응하고, 신경도 잘 안 썼던 게, 너무나 후회되었다. 전원우에게 얽매여 있던 실이 무엇인지 이제 알았다. 이기심처럼 보일 수 있는 그 실은 사실, 사랑이라는 실이었다. 그리고, 그 실은 이제 나에게도 다가와 나를 완전하게 얽매었다. 더이상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결혼 1주년이니, 선물은 줘야지. ... 때가 됐다, 드디어. 박태산을 죽이러 갈, 시간이.

 

 

액셀을 밟아 박태산의 사택으로 향했다. 자신의 재력과 권력을 자랑하고 싶은 것인지, 매우 화려했지만, 또한 매우 옹졸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박태산이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니, 내 사랑하는 손자야. 사랑하는 손자는 무슨, 사랑하는 손자 남편을 누가 유산 시키고 누가 탐한단 말인가. 가식적인 그 말투에 절로 구역질이 났지만, 참으면서 박태산에게로 다가갔다. 불길함을 느낀 것인지, 뒤로 점점 물러나는 꼴이 볼 만 했다.

 

 

"할아버지, 저한테 할 말 없으세요?"

"... 무슨 할 말, 말이니?"

"전원우, 관련으로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시잖아요. 아니에요?"

"... 없는데?"

"뭐, 있으셔도 들을 생각은 없었어요."

 

 

옆에 놓여 있던 줄을 손에 집어들었다. 그의 눈이 공포에 질려가는 것을 보며, 나는 그를 죽였다. 나름대로의 아버지의 복수라고 옆에 놓여있던 초에 불을 붙여 촛농으로 얼굴을 덮었다.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아버지를 죽였을 때부터, 이 새끼는 내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니까. 그 뿐인가, 내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까지 했다. 이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 같아서 허무한데, 권순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권순영 - 전원우가 남긴 말인데,

           - 경황이 없어서 이제 알려주는 건 미안

           - (음성 파일)

 

 

이게 뭘까, 싶었지만, 내 손은 곧장 재생 버튼을 눌렀다. 전원우의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곧 죽을 것... 같아서...]

[... 난 행... 복하다고... 결국 나한테는 이.. 게 해... 피 엔딩... 이라고...]

[민규... 한테... 전해...]

 

 

나는 그 목소리에 주저앉았다. 괜히 죽인 건가 싶으면서도 딱히 후회는 없었다. 행복했다면, 된 거다. 원우에게 결혼 기념일 선물이 마음에 들진 모르겠지만, 그건 찾아가서 물어보면 되는 거니까. 박태산을 죽인 그 줄로, 내 목을 얽매었다. 그리고, 나는... 전원우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