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뽀] 커피 향도 스치면 인연 中-1
2021. 2. 9. 00:10

 

 

하필 승부욕 강한 사람한테 걸려서. 그래요, 그렇다고 쳐요. 간단하게 뱉었던 대답과 달리 월요일을 코앞에 둔 민규의 표정은 예방주사를 맞기 직전의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아. 승관아. 나 괜히 한다고 했나 봐. 며칠 전의 이야기를 석민에게 전해 들은 승관은 혀를 차며 디저트가 진열된 쇼케이스를 소리 나게 닫았다. 그러게 돈지랄 하고 싶으면 나한테나 하지. 왜 그런 되도 않는 짓을 한다고 해서는. 후회를 하고 있는 건 맞았지만 저를 나무라는 소리에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간을 잔뜩 좁힌 민규는 통유리를 닦던 걸레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뭔 돈지랄이야.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까?

 

"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 들어나보자 김 사장아. "

" 고양이가 예뻤어. "

" ... 돈지랄해달라고 했더니 그냥 지랄을 하네. "

 

고양이한테 넘어가서 그런 내기를 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린 채 고개를 절레 흔드는 승관의 눈치를 보던 민규는 다시 걸레를 주워들고는 심란한 마음을 가득 담아 유리창을 닦아냈다. 진짠데. 항상 사람이 북적이는 더 블랙과는 달리 적당히 여유롭고 적당히 쉴 수 있는 가게. 그 안에서 부서지던 햇빛과 그 아래의 회색빛 고양이, 그리고 검은 머리칼의 주인. '나비책장'을 이루고 있던 그 모든 것들에 넘어간 게 확실했다. 넌 아무것도 모른다, 어? 그렇게 한참 투닥거리던 그때. 고개를 돌리자 유리창 앞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 머리칼을 발견한 민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키웠다. 어...!

 

" 미리 좀 염탐하러 왔어요. "

 

방금 전까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나비'가 눈앞에 나타났다.

 

 

커피 향도 스치면 인연 中-1

w. 라뽀

/ 월간민원 2020년 11월호의 上편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

 

 

뒷짐을 진 채 이리저리 가게를 둘러보는 원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민규는 갑작스레 멈춘 원우 탓에 바짝 붙은 채로 제자리에 섰다. 왜, 왜요? 빙글 몸을 돌려 민규를 바라보는 원우의 눈에는 어렴풋이 장난기가 비치는 듯했다. 오늘부터 시작할래요? 내기. 당황한 민규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슬쩍 승관이 서 있는 카페 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무것도 생각을 안 해놔서... 내일부터 하면 안 돼요?

 

" 준비성이 없는 편이구나. 난 벌써 만들어 왔는데. "

" 내가 준비성이 없는 건 아니고, 원우 씨가 철저한 거죠. "

" 하루 전인데도 백지상태면 준비성이 없는 게 맞죠. "

 

애써 자기방어하지 마요. 눈에 다 보이네. 한 마디도 질 생각이 없는 듯, 오는 말을 모두 되받아 친 원우는 웃으며 바로 옆에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아 자신이 가져온 에코백을 열었다. 무슨 차인지 안 궁금해요? 완전 페이스 말렸네. 중얼거린 민규는 바로 맞은편에 앉아 원우가 건넨 텀블러를 열어 코 바로 앞까지 가져댔다. 음... 이거 어디서 맡아봤는데. 이석민네 가서 맡았던 거 같기도 하고... 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민이는 꽃 가게 하잖아요. 이건 꽃차고. 너무 당연한 말 아닌가. 원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민규는 이내 묘한 표정을 지어냈다. 석민이? 네, 석민이요.

 

" 이석민을 아세요? "

" 근처에서 장사하는데... 당연히 알죠. "

" 친해요? "

 

뭐, 나름대로 친하죠. 꽃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잖아요. 대답을 듣고도 떨떠름한 표정이던 민규는 머그를 가져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을 마른 수건으로 닦던 승관은 잠깐 사이 변한 민규의 표정을 보며 저 멀리 앉은 원우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작게 낮췄다. 표정이 왜 그래? 폐기 직전 빵처럼 생겨먹었네. 어이가 없다는 듯 크게 허, 소리를 낸 민규가 마른 수건을 빼앗아 재차 컵을 닦아냈다. 사람 보고 폐기 직전 빵이 뭐냐?

 

" 비유도 몰라? 그 정도다, 이거지. "

" ... 아, 몰라. 이석민이랑 친하대. "

" 몰랐어? "

 

석민이가 저 분 꽃차 맛있다고 했어. 티팟 몇 번 빌리면서 친해졌다는데. 듣다 보니 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보다 먼저? 야. 걘 왜 그런 걸 안 알려준대? 방금 전까지 폐기 빵을 운운하던 승관의 표정이 딱 그 꼴로 변했다. 김민규야, 안 가냐? 내쫓기듯 홀로 빠져나온 민규는 꽁한 마음을 가득 안고 원우에게로 향했다. 왔어요? 마치 그날의 나비와 같이 나른하게 창으로 들어오는 볕을 쬐던 그가 고개를 돌려 민규의 손에 들린 잔을 바라보았다. 아. 짧게 앓는 소리를 낸 원우는 민규가 내려놓은 까만 머그 두 개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마음에 안 드네.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은 민규가 채 그에게 되묻기도 전에 원우는 차를 머그에 나눠 따르며 말을 이어갔다. 봐요. 까만 컵이라 차 특유의 색감도 안 보이고, 꽃잎도 잘 안 보이잖아요. 아. 늦게 와서 그런 줄 알았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민규가 차가 담긴 머그를 들었다. 커피 향만이 가득했던 코 끝에 은은한 꽃향기가 맴돌았다. 얼른 마셔봐요. 조금은 기대에 찬 눈빛이 자신에게 닿아오자, 민규는 고민 끝에 차를 입에 머금었다. 호로롭. 새로운 맛에 겁이 나 아주 조금 머금고 맛을 음미하자 입안에 달콤한 맛이 퍼졌다.

어... 괜찮네...? 생각보다 긍정적인 반응에 긴장하고 있던 원우의 자세가 조금은 풀어졌다. 장미차는 스트레스 완화에 좋아요. 괜찮다니까 다행이다. 민규는 쥐고 있던 머그를 몇 번 더 기울이고서야 테이블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만들었어요? 마치 며칠 전 처음 가게를 방문했던 어린아이가 떠올라 옅은 미소를 띤 원우는 차근차근 순서를 읊기 시작했다.

 

" 식용 장미 사서, 그늘에 바짝 말리고, 햇볕 쬐어주고… "

" 잠시, 잠시만요. 그... 직접 말려야 해요? "

" 파는 것도 있는데, 정성이 좀 부족해 보여서. "

 

나중에 마시고 싶어지면 말해요, 말려둔 거 조금 줄게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민규는 가만히 머그 안을 유유히 떠다니는 장미잎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원우 씨, 오늘 원우 씨가 차 가져왔으니까 커피도 마셔볼래요?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끔뻑이던 원우가 고개를 저어냈다. 아뇨. 그러려고 온 건 아니라. 진짜 염탐하려고 온 거예요. 씁. 어린애 혼내듯 미간을 좁혀낸 민규가 고개를 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만 염탐 당하는 건 좀. 기다려봐요, 만들어 올게요.

이내 카페 바(Bar)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민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원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아니, 민규 씨. 저 마음에 준비가 덜 됐어요. 정작 자긴 다짜고짜 염탐을 핑계로 차를 우려 왔으면서, 이제 와서 마음의 준비 타령을 하는 게 퍽 우스웠다. 아, 네네. 설렁설렁 대답한 민규는 디카페인 원두가 담긴 전동 그라인더를 켰다. 지이잉. 가게를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에 원우의 목소리 역시 사그라들었다.

 

" 혹시 커피 내려본 적 있어요? "

" 네? "

" 커피. 내려본 적 있냐구요. "

 

포터 필터에 적당량의 원두 가루를 내리면서 민규는 몸을 원우 쪽으로 기울여 목소리를 키웠다. 원우 역시 그런 민규에게로 조금 몸을 기울였다. 은은한 차의 향과 커피 향이 뒤섞였다. 네. 에스프레소는 배워봤어요. 의외라는 표정과 함께 민규가 그라인더를 끄자, 카페 안은 다시 잔잔한 노래만이 흘렀다. 의외다. 커피 배웠구나.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원우는 셔츠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에스프레소 내리다가 포기했어요. 저랑 커피는 진짜 안 맞더라구요. 그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민규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탬핑을 하고, 그룹 헤드에 그것을 조립하고 커피를 내리는 모습까지. 버벅거리지 않고 깔끔하게 맞아떨어졌다. 끊기지 않고 무사히 잔을 채우는 에스프레소를 확인한 민규는 바에 살짝 기대어 팔짱을 꼈다. 자, 커피랑 안 맞는 원우 씨. 생각을 한 번 해봅시다 우리. 만약에 원우 씨가 커피를 마신다면 어떤 커피를 마시고 싶어요?

 

" ... 너무 쓰면 카페인이 강할 것 같은데. "

" 차피 디카페인이라 크게 상관은 없는데... 오케이, 그럼 아메리카노는 패스. "

" 이왕 마신다면... 부드러운 느낌이요. "

" 음... 그럼 카페라떼에다 시럽 타서? "

 

부드럽고, 조금은 달게. 민규의 말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인 원우는 그저 그가 하는 행동을 눈으로 좇았다. 석민이한테 들었던 것보다 훨씬 괜찮네. 제 자신이 석민에게 들었을 때는 그냥 인기 많은 'SNS 감성' 카페였는데. 사장이 커피 내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오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맛이야 먹어 봐야 알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민규는 라떼 아트가 얹어진 라떼를 원우에게 내밀었다. 마셔봐요. 맛이랑 향은 일반 커피랑 비슷할 거예요. 건네받은 머그 위로 잎사귀 모양이 흔들렸다. 어. 흘릴세라 입을 가져댄 원우는 저도 모르게 한 모금을 넘기고 말았다. 흐를 듯 출렁이던 라떼에 놀란 민규가 괜찮냐고 물을 때까지 원우는 얼굴을 굳힌 채로 잔에서 입을 떼지 않았다. 원우 씨 괜찮아요? 안 데었어요? 그제야 입술을 떼어낸 원우는 잔을 내려놓고 곁에 놓인 티슈로 제 입가를 닦아냈다.

 

" 데인 건 아닌데... "

" 그럼요? 놀랐어요? "

" 아니, 그것도 그런데... "

 

생각보다... 맛이 괜찮아서요.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고, 디카페인치고는 향도 맛도 자신이 마지막으로 맛보았던 카페인 커피와 비슷했다. 칭찬을 하자니 괜스레 낯간지러워진 원우는 자신이 마신 탓에 찌그러진 잎사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근데 왜 잎사귀 모양이에요? 원래 그, 라떼 아트는 하트가 기본 아닌가... 넌저시 물어보는 원우에 웃음이 터진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제가 라떼 아트를 좀 잘해요. 그리고 원우 씨가 준 차에 장미잎 있었으니까... 전 잎사귀. 아아... 다시 잔을 든 원우는 민규가 다 쓴 머신을 정리할 동안 커피를 남김없이 마셨다. 마치 남들이 보았을 때 카페인과 천생연분인 사람처럼.

싱크대에 다 마신 머그를 담은 원우는 자리로 가 정리를 하곤 에코백을 들었다. 저, 제가 할 건 다 했으니까 가볼게요... 어느덧 나와 설거지를 하던 승관은 포스기 앞에 서선 잘 가라며 인사하는 민규를 떠밀었다. 어, 민규야. 세제가 다 떨어졌다. 나가서 좀 사와라. 순식간에 원우의 앞으로 밀린 민규는 황당하다는 듯 승관을 째려보았다.

 

" 탈의실 옆 박스에 있는 건 뭔, "

" 전 모르죠, 사장님. 세제 사 오세요. 오렌지 향으로. "

 

그, 찻집 사장님? 조심히 가세요! 그쪽 동네에 마트 있으니까 김민규가 데려다주면 되겠네. 알겠지? 싱긋 웃은 승관은 고개를 까딱이곤 싱크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 진짜... 앞치마를 풀어낸 민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원우에게 눈짓했다. 가는 길이니까 데려다 드릴게요. 같이 가요. 그럴 필요 없다며 말을 흐리던 원우는 근처에서 자꾸만 힐끔거리는 승관의 얼굴을 보곤 마지못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카페들이 마감을 향해 달려가는 시각. 땅거미 진 골목에 두 개의 그림자가 나란히 움직였다. 나비는요? 미묘한 어색함을 깨기 위해 튼 나비 안부에 원우는 조금 들뜬 듯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나비가 하루 종일 제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부터 오늘 나비가 먹은 간식까지. 사실 민규는 그보다 원우의 이야기가 궁금하긴 했지만, 뭐 어떤가. 이 또한 원우의 이야기인 것을. 조금은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걷던 두 사람은 처음 만났던 장소, 불 꺼진 나비책장 앞에서 멈춰 섰다. 조금은 이르게 켜진 가로등과 나비책장의 간판. 저 가볼게요. 에코백의 끈을 만지작거리던 원우가 짧게 꾸벅이곤 가게 바로 옆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민규는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 원우 씨. 그런 목소리에 몸을 튼 원우는 반쯤 벽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로 민규를 바라보았다. 왜요?

 

" 그, 우리 오늘은 내기로 안 치는 거죠? "

" 어... "

" 내일부터 하기로 했잖아요, 우리 내기. "

 

그냥 궁금해서... 굳이 원우 씨가 오늘도 내기로 치고 싶다면 그래도 되는데. 원우는 고개를 저어냈다. 아니, 이건 제가 갑자기 그런 거니까... 무효로 해요. 진짜 내기는 내일부터. 손을 등 뒤로 감추고 괜히 제 손등을 쓸어내리던 민규는 미소 지었다. 다행이다. 오늘은 원우 씨가 카페로 왔으니까, 내일은 제가 책장으로 올게요. 괜찮죠? 잠깐 고개를 숙였다 든 원우는 이내 고개를 저어냈다. 그... 내일 제가 갈게요. 더 블랙으로. 원우의 말에 조금은 놀란 민규가 되묻자, 원우는 아까보다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간다구요.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했으니까. 제가 간 것도 무효.

 

" ... 그래요. 무효 치곤 재밌었어요."

" 어... 저도요. 내일 봐요, 민규 씨.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원우는 골목으로 모습을 감췄다. 왠지 모르게 밀려드는 아쉬움과 함께 돌아가기 위해 몸을 틀던 민규의 귓가에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민규 씨...!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춰 선 민규의 품에 안겨진 건 아까 원우가 가져왔던 텀블러였다. 이거, 아직 남아서... 제 앞에 선 원우를 바라본 민규는 텀블러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아... 이거 저 마시라구요...? 고개를 끄덕거린 원우는 어쩐지 미적지근한 민규의 반응에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 싫으시면 제가 가져갈게요. 아무래도 처음이고, 적응이 아직 안 됐을 수도. 그런 원우의 손에 닿아온 건 민규의 왼손이었다. 예상치 못한 온기에 놀란 원우는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 이거, 한 잔으로는 좀 아쉬웠거든요. 집에 가서 생각날 것 같았는데... 고마워요. "

" 아... 어차피 내일 또 볼 텐데... "

"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오늘이잖아요. "

 

내일은 다른 꽃 차로. 그렇게 싫어하던 건데 지금은 좀 기대되네.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린 민규는 뒤로 한 발짝씩 멀어졌다. 그럼 민규 씨는... 다른 커피 주세요. 내일은 더 달달한 커피로. 고개를 끄덕인 민규는 점차 멀어지는 원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밤새 생각해봐야겠다... 잘 마실게요! 잘 자요, 원우 씨.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간 원우는 들킬세라 그림자에 몸을 숨겨 민규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나, 잘 수 있을까요. 괜히 잡혔던 손을 쥐었다 편 원우는 골목 안에 자리 잡은 나비와 자신의 보금자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