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 포토빌드 / 上
2021. 2. 9. 00:02

 

포토 빌드 / 上

Q. 사랑하고 있나요?

 

 

 

 

 

 

 

 

 

 

 

 

 

 

 

 

 

 

 

 

 

 

4년 전, 스무 살의 가을이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서울에 처음 올라와 보내던 2년은 낯설고 또 즐거웠다. 스무 살, 또래라면 보통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나이. 하지만 여름이 지나고 나니까 들뜬 마음도 한풀 꺾인 뒤였다. 서울이라고 해서, 스무 살도 별거 없구나. 깨닫고 나니까 가볍게 우울해졌고 자주 지루해졌다. 물론 이것도 별거 아닌 감정들이다. 맥주 한 잔, 치킨, 얼빠지게 웃긴 코미디 한 편이면 금세 털어낼 수 있을 만큼. 그 날 역시 별거 아닌 내 스무 살의 날들 중 하루였다. 사소한 것들이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전원우, 너 오늘 알바한다고 그냥 갔다며.

 

“어.”

 

너 정말 이럴래? 이번에 정말 어렵게 만든 자리였어. 스물 하나에 저 정도 집안 만나려면 어려운 거 몰라서 이래?

 

“싫다고 했잖아.”

 

당장 돌아가서 사과하고 밥 먹고 와. 지금 누나 꼴이 얼마나 우스워졌는지 알아?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난 누구처럼 집안 따져가면서 사람 만날 여유 없으니까.”

 

야 전원우.

 

“누나한테 동생이란 거 없었잖아, 이제 그만하자 제발.”

 

 

 

원하지 않았던 소개팅도, 겉돌기만 했던 대화도, 무엇보다 모난 말만 나불거리는 나 자신도. 방금 전 그 자리에서 마셨던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음료수의 맛 같았다.

 

 

 

 

 

 

“뭐야, 소개팅 하느라 늦는 거 아니었어?”

 

“누구한테 들었어, 네가 스파이냐.”

 

“아니, 내가 너네 누나 스파이를? 어우.”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는지 몸서리를 친다. 전원우가 알바하는 이 카페에 사장이자 전원우의 친구 권순영.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모든 해야 하고 칼 같이 해내는 완벽주의자. 그 성격 하나로 아홉살 어린 나이에 전원우와 고향을 떠나 서울 사촌 내에서 정착한지 8년이 지나고 고등학교를 들어가자마자 자퇴 후 검정고시에 합격한 나름 서울 반 토박이. 2년을 카페 준비로 인생을 받쳤다. 그 결과 지금 이 카페는 잘 나가고 있는 중이고.

 

 

 

“표정 보니까 또 그냥 왔네.”

 

“어떻게 알았냐니까.”

 

“승철이 형이 지나가다 봤대. 그래서 오늘 늦는다고 했던 게 그거구나 했지.”

 

 

 

최승철. 서울에 전원우를 데리고 온 사람, 올라와서 힘들어 하던 전원우를 도와준 형이다. 고향에서 알고 지낸 형이기도 하고 지금은 워낙 성공한 형이라서 갓 서울에 상경한 전원우를 도와주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럴 생각으로 데려온 거겠지만. 현재 전원우가 지내는 오피스텔 역시 최승철과 권순영의 도움으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둘에게서 자기라는 짐을 덜어주겠다는 전원우의 목표. 그걸 위해 악착같이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5분도 채 앉아있지 않았는데 최승철의 회사 주변 카페라 그런가 봤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쟤 땡땡이 쳤나봐.”

 

“누구.”

 

“저기 구석에 고딩. 지금 음료 하나 시키고 몇 시간 째 있네, 가출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카페 가장 구석탱이. 전원우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였다. 벽과 벽 사이에 놓여진 하나의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건 아니지만 저기에 들어가면 주의깊게 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를 정도로 조용하고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자리였다. 조용한 걸 좋아하는 전원우가 그 자리에 단골이었다. 권순영은 쓸데없는 자리라며 없애려다가 그곳에 앉아있는 전원우가 꽤 행복해 보여서 그냥 냅두기로 했다. 알바하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저 자리는 어떻게 알았을까. 얼굴에 들어찬 자기주장 확실한 눈, 코, 입.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건지 밝지 않은 표정. 앉아있지만 결코 작지 않은 것 같다는 확신에 다부진 어깨와 앉은 키. 모든 게 시선을 끌었다.

 

 

 

“시험 끝났겠지. 일이나 해.”

 

“넌 그게 사장한테 할 말이야?”

 

“바지 사장.”

 

“뭐? 야이씨, 너 오늘 마감해.”

 

 

 

권순영 답지 않게 버럭한다. 괜히 못 들은 척 밀린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정말로 권순영은 마감 한 시간 전에 가차없이 나가버렸다. 카페 키도 쥐어주고. 진짜 칼같은 자식. 마감은 원래 전원우 몫이긴 했다만 오늘 같은 날에는 권순영랑 술이나 마시고 싶었는데. 집 가는 길에 맥주나 사서 권순영 집에나 가야지. 권순영의 집은 전원우 오피스텔과 한층 차이였다. 그니까 한낮 알바한테 카페 키를 던지고 가버리지. 꽤 늦어진 시간에 카페 안은 조용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커플이 떠나고 커플이 마신 컵을 닦고 카페 밖 간판을 정리하러 나갔다 들어왔다. 오늘 하루도 참 잘 버텼다. 그러다가 문득 돌아본 자리에는 여전히 그 고딩이 앉아있었다. 낮에 봤던 것보다 더 가라 앉은 머리와 축 처진 어깨. 그리고 더 어두워진 표정, 딱 오늘 전원우의 기분과 같았다. 평소라면 그냥 무시했을 텐데, 오늘은 누구라도 붙잡고 싶었던 걸까. 그게 겨우 고딩이라니. 진짜 가출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됐던 거라고 넘겼다. 무슨 용기였는지 고딩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고딩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꽤 요란스럽게 앉았는데 푹 숙인 고개가 들릴 기미가 안 보였다.

 

 

 

“집 안 가요?”

 

 

 

오늘따라 용기가 넘쳤다. 원래 기분이 거지 같으면 없던 용기가 솟아오르나. 가출 했어요? 하고 묻기에는 너무 예의도 없고 만약 진짜 가출이라면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 집에 안 가냐고 물었다. 그제야 들어올린 얼굴에는 어린 티가 많이 나지 않았다. 그냥 곧 성인이겠구나 싶은 그런 얼굴.

 

 

 

“아...”

 

 

 

그 말이 가라는 말로 들렸는지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기는 모습에 당황한 건 오히려 전원우였다. 아니, 학생... 가라는 말이 아닌데... 덜컥 가방을 챙기는 고딩의 팔을 잡았다. 멈칫한 고딩이 잡힌 팔을 쳐다본다. 놀란 건 또 전원우였고. 자신이 뭘 한 건가 싶어서 빠르게 손을 놨다.

 

 

 

“가라는 말 아니에요, 그냥 걱정돼서. 손 잡은 건 미안해요.”

 

“저기,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어? 아, 그래요.”

 

“형 저 부탁이 있는데.”

 

“뭔데요?”

 

“충전기 있어요?”

 

 

 

예상을 빗나간 질문이다. 갑자기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묻더니 이번에는 충전기. 무슨 예상을 다 벗어나. 카운터 아래에 놓여진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내 고딩한테 전해줬다. 벽 면에 붙은 콘센트에 충전기를 연결해 폰을 충전시키기 시작한다. 고딩도 아이폰이구나, 안드로이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저는 김민규에요.”

 

“아, 나는.”

 

“형은 전원우.”

 

“네?”

 

“거기, 명찰에 있는 거 봤어요.”

 

 

 

고딩 주제에 형아를 놀리면 쓰나. 사실은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면 알 수 있었다. 명찰이란 건 그런 거니까. 그제야 고딩이 입고 있던 하복 셔츠에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김민규. 정갈한 바탕체로 쓰여진 이름. 생긴 것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왜 하복을 입었을까. 아무리 초가을이라도 밤에는 꽤 쌀쌀했다. 푹 꺼진 고딩의 가방에 자켓 같은 건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안 추워요?”

 

“아 저 열이 많아서 괜찮은데 형은 추위 많이 타요?”

 

“아, 맞아요.”

 

 

 

열이 많은 김민규. 그 외에도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수능을 앞둔 고삼이라는 사실, 가출한 적은 없다는 사실, 어느 고에 다니는 것까지. 오늘 늦게까지 이곳에 있었던 이유만 몰랐다. 그렇게 별거 아닌 시시콜콜한 얘기들이 전원우한테는 새로웠다. 오늘 하루도 평소와 같은 하루였는데, 처음 만난 고딩 때문에 특별한 하루가 됐다는 게 참 신기했다.

 

 

 

 

 

 

얼마나 얘기한 건지 이미 시간은 마감 시간을 훌쩍 넘긴 10시였다. 마감 시간은 9시, 자그마치 한 시간 사십분을 놀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것도 권순영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서였다. 일찍 집에 간 권순영은 사실 전원우 기분이 꿀꿀한 걸 알고 있었고 집에서 미리 먹을 걸 세팅하고 기다렸는데 이미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에 연락도 안 받는 전원우를 찾으러 왔다고 한다. 내성적이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전원우가 아까 그 고딩과 얘기하고 있던 게 신기했던 권순영은 놀라운 광경을 봤다고 떠들었다. 얼떨결에 대화가 마무리 되고 민규도 집에 가야 한다며 같이 카페를 나섰다. 가는 길이 달랐던 민규와 정반대로 몸을 틀고 두 걸음 정도 걸었을까. 이대로 보내기엔 아쉬워서인지 전원우는 다시 몸을 틀고 민규를 불렀다.

 

 

 

“민규야.”

 

 

 

조용한 길가에 울린 전원우의 힘 있는 목소리는 너무 잘 들렸고 자신의 이름이 울린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긴 김민규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더워도 겉옷은 챙겨 다녀요.”

 

 

 

당당하게 소리친 호명에 비해 간결하고 조용한 문장이었다. 겉옷은 챙기라는 말. 김민규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들고 뒤로 돌아 다시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전원우 옆으로 권순영이 걸어왔다.

 

 

 

“가출이래?”

 

“아니.”

 

“그럼 차였대?”

 

“아니.”

 

“너한테 관심있대?”

 

“아니, ...뭐?”

 

“뭐야, 꽤 재밌어지는 줄 알았는데.”

 

“순영아, 쟤 고딩이거든?”

 

“아님 말고. 그래도 곧 성인이라며.”

 

 

 

순간 그냥 넘어갈 뻔 했다. 아무리 내가 남자를 좋아해도 무슨 고딩이야. 권순영은 폭탄 발언을 던져놓고 태평하게 갈 길을 갔다. 전원우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권순영과 최승철만 알고 있었다. 아, 가족들도. 이젠 가족일까 싶지만 호적상으로는 여전히 가족이었다.

 

 

 

 

 

 

 

 

 

 

고딩과의 만남, 김민규와의 만남 이후로 늘 같은 하루들을 반복했다. 권순영과 일을 하고 마감 후에는 맥주를 따서 영화 한 편 보고 잠을 자고. 쉬는 날에는 늦잠을 자고 최승철과 권순영이랑 저녁을 먹기도 했으며 평소와 다를 거 없는, 별거 아닌 하루를 살았다. 민규는 그 날 이후로 카페에 오지 않았다. 마감을 혼자 하는 날에는 10시까지 기다려 본 적도 있었지만 괜한 짓이었다. 왜 기다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뭔가 그래야만 할 것 같았으니까. 오늘 역시 그런 기분이 들었다. 훅 스쳐가는 촉이라고 해야 하나. 최근에는 마감 시간에 맞춰 잘 퇴근 했는데 또 이랬다. 가끔 하루씩 쓸데없는 촉 때문에 마감 시간을 늦추곤 했다. 물론 하나같이 다 별일 없었지만. 권순영은 프랜차이즈 사업을 준비한다고 한창 바빴고 일주일 내내 마감은 혼자 하게 됐다. 이제 겨우 2일차, 어제는 시간을 맞춰 집을 갔는데 오늘은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아침부터 알람 없이 일어났고 종종 놓치던 버스도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왔으며 편의점에 하나 남은 최애젤리도 샀고 진상이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는 마감 시간이 다가오니까 비가 왔는데 가방 속에 우산이 들어있었다. 권순영이 비 온다고 멋대로 가방에 넣어준 우산이었다. 평소라면 없었을 우산, 운이 너무 좋은 하루여서 그랬나 더 이상했다.

 

 

 

“그럼 그렇지. 뭐하냐 전원우...”

 

 

 

열한시. 무려 두시간을 혼자 카페에 있었다. 권순영 또 전기세 걱정하겠네. 가방을 챙겨 카페를 나섰다. 문을 잠구고 철장을 내려 한 번 더 잠궜다. 하늘에 구멍이 아니라 무너진 듯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 날을 싫어하는 전원우는 그치면 갈까 생각도 했지만 금방 그칠 기색이 없어보여서 포기하고 우산을 펼쳤다. 아니 펼치려고 했다.

 

 

 

“...민규야.”

 

 

 

가방에서 우산을 찾고 펼치려고 앞을 봤을 때 눈에 들어온 신발. 깔끔한 화이트 톤의 운동화.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어두운 표정과 달리 유독 하얗고 빛나던 신발. 김민규의 신발이었다. 너무 예뻐서 한동안 사이트를 다 뒤졌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던 그 신발... 신발이 빗물에 젖고 흙탕물이 이리저리 튀어 지저분했다. 신발의 주인 역시 비에 쫄딱 젖어 입고 있던 교복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산은 커녕 조금이라도 가릴 수 있는 가방조차 없었다. 입고 있는 교복 와이셔츠와 남색 마이가 젖어 더 진해졌을 뿐. 처음 만났을 때는 어린 티가 나지 않는다 생각했던 그 고딩이 덜덜 떨고 있었다. 전원우가 이름을 불러주자 한없이 무너졌다. 어린 애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마치 몇 년전 전원우의 모습 같아서 동정을 했다. 그 아이를 혼자 냅두기 싫어서 빗속을 걸어나갔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우산과 가방을 내려두고 비로부터 전원우를 막아주던 카페 천막을 벗어나서 무작정 김민규에게 향했다.

 

 

 

“원우 형. 나, 어떡해요...”

 

 

 

끌어안은 목덜미가 차가웠다.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차가움이 김민규를 지나 전원우에게 전해졌다. 처음 만난 그 날 짧은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김민규는 밝고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란 걸. 그런 애가 이렇게 무너지는 이유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 거라고. 그걸 버티다가 한없이 자신에게 상처 입히는 일을 했을 거라고. 추위에 약한 전원우는 비가 오는 것도 차가워진 몸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김민규에게서 떨어지면 자신처럼 끝까지 무너진 뒤에야 겨우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될 김민규를 조금이라도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바닥까지는 가지 않기를. 무의미한 상처내기는 멈추기를. 경험에서 나오는 진심이었다.

 

 

 

 

 

 

 

 

 

 

비를 맞고 서있던 시간이 10분이 넘어가자 이대로는 진짜 둘 다 얼어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전원우가 김민규를 데리고 카페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가방에서 폰을 꺼내 달달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마침 오늘 야근을 해서 이제 퇴근하던 길이라며 오겠다고 했고 전화가 끊기고 얼마 안 있어 카페 앞에 도착한 그 사람은 김민규와 전원우를 보고 놀라 차에서 내려 곧바로 다가왔다. 보기보다 더 놀란 건지 가만히 서있는 상대방, 그런 최승철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전원우의 눈길이 통했다. 한숨을 내쉰 최승철은 일단 타라며 전원우의 가방을 챙겨 차에 옮겼다. 그리고는 트렁크에서 봉지도 뜯지 않은 새 담요를 꺼내 하나씩 쥐어줬다. 멍하니 서있는 김민규의 등을 밀어 차 뒷자석에 태운 전원우도 보조석에 올라탔다. 그렇게 말없이 전원우의 오피스텔에 도착한 셋은 지금 전원우의 오피스텔에 같이 들어선 이후였다. 김민규부터 화장실로 집어넣은 최승철이 전원우를 끌고 권순영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309동 420호 전원우의 오피스텔 한층 아래 320호 권순영의 오피스텔.

 

 

 

“어? 형 무슨 일, 야 전원우 뭐야 너. 왜 이래요 얘.”

 

“화장실 좀 빌리자.”

 

 

 

권순영 역시 놀랐는지 바로 비켜서며 보일러를 틀었다. 최승철은 옷을 챙겨오겠다며 다시 올라갔고 현관에 서서 가만 있는 전원우를 잡아서 화장실까지 데려다 준 권순영이 일단 씻고 나오라고 했다. 아마 씻고 나오면 다 물어보겠지. 그럼 말해야 하나. 나도 잘 모르는데... 따뜻한 물에 몸을 적셨다. 잘게 떨던 몸이 진정됐다. 당장 잠들어도 이상할리 없을 만큼 노곤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걱정이 됐다. 낯설다고 금방 나가버릴까봐 마음이 다급해졌다. 최승철이 화장실 문 앞에 둔 옷을 갈아입고 황급히 문을 열고 나섰다. 뒤에서 전원우를 부르는 권순영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차마 신발까지 챙길 시간이 없어서 권순영의 슬리퍼 하나를 신고 나왔다. 겨우 한 층인데 하나하나 계단을 오를 때마다 떠났을까 불안했다. 머리에서는 다시 물이 떨어졌다. 비밀번호를 치는 손이 떨려왔다. 두 번이나 틀린 비밀번호를 다시 입력하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고 최승철이 나왔다. 승철이 형이 붙잡는 손을 떼고 집으로 들어서서 화장실 앞에 섰다.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무 늦었나,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현관을 봤다. 승철이형 구두... 내 슬리퍼... 권순영 슬리퍼... 낯선 신발이지만 익숙한 신발. 하얀 운동화였다. 아직 여기 있었다. 닫혀 있는 안방 문으로 향했다. 문을 벌컥 열었다.

 

 

 

“형?”

 

 

 

열자마자 마주친 김민규. 전원우의 옷을 입은 김민규가 머리를 털며 마침 방을 나서려던 참이었나보다. 안도감을 느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려 바닥에 털썩 앉았다. 놀란 김민규가 아무것도 못하고 서 있자 최승철이 달려와서 제지하고 전원우를 끌어다 침대에 눕혔다. 자주 있는 일, 전원우는 갑자기 몸의 온도가 확 떨어지거나 벌떡 일어나기만 해도 휘청거렸다. 정신을 잃기 전에 최승철이나 권순영이 잘 해결해줘서 쓰러진 적은 없지만. 해결법은 다시 몸을 데워주면 된다. 최승철은 침대에 눕혀진 전원우를 이불로 돌돌 말고 보일러를 틀었다. 최승철이 벙찐 김민규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까지도 조용히 지켜만 봤다.

 

 

 

“원우가 추운 걸 못 버텨요. 흔한 일이니까 너무 걱정말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학생 탓은 아닐 거니까.”

 

“...네.”

 

“잠깐 얘기 좀 하고 나갈게요, 거실에 앉아 있어요.”

 

 

 

김민규를 타이르는 모습이 퍽 어른다웠다. 애 달래듯 굴어도 상대가 전혀 기분 나쁘지 않게 굴었다. 그게 최승철의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김민규가 나가고 문을 닫고 다가온 최승철이 간이 의자를 끌고 와 침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다는 의미였다. 아니 사실 걱정의 의미였다. 모른다고 해도 최승철은 넘어갈 것이었다. 다만 내가 저절로 말하게 되는 게 문제지만.

 

 

 

“형.”

 

“말 안 해도 돼. 사정이 있었겠지, 너도 쟤도.”

 

“갈 거야?”

 

“가라는 말이지?”

 

“얘기 좀 하려고...”

 

“밑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고. 순영이는... 모르겠다, 잘 얘기할게.”

 

“응, 고마워.”

 

 

 

최승철이 방에서 나가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최승철은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 말 안 하고 갔지만 밑에 있는 권순영이 문제였다. 분명 최승철이 가면 캐묻겠지만 권순영도 최승철한테 설득 당할 예정이니까.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최승철이 나가면서 설명을 해주지 않아서 꽤 답답할 김민규가 잠잠했다. 시간이 흘러도 방 근처에 기척은 없었고, 분명 전원우를 향한 배려일 것임에 기특했다. 몸이 어느 정도 괜찮아진 것 같아서 가디건을 하나 걸치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다가 전원우가 나오자 벌떡 일어나는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았다. 주인 기다리던 강아지. 그게 웃겨서 웃음이 나오려던 걸 겨우 참았다. 옷이 딱 맞네. 아직 덜 자란 놈인데도 전원우의 옷이 딱 맞았다. 사실 팔, 다리 전부 짧았지만 뭐 저 정도면 괜찮지. 더 크면 안 맞겠다. 그러다 발견한 김민규의 입술이 퍼랬다. 민규도 추웠겠지. 주방으로 향한 전원우는 물을 끓였다. 커피는 좀 그렇고 그냥 핫초코. 커피 보다는 핫초코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중요한 건 핫초코랑 커피만 먹는 전원우라서 먹을 게 없었다.

 

 

 

“핫초코... 다 마셔요.”

 

 

 

비웃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잔말없이 따뜻한 컵을 감싸쥐고 마셔준다. 마시면서 계속 눈치를 보는 게 안쓰러워서 손을 뻗어 손을 잡아줬다. 진짜 너 때문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저번처럼 잘못 전달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번엔 잘 알아들은 건지 홀짝홀짝 잘 마셔댔다. 이럴 땐 꼭 어린 아이의 티를 벗어내지 못한 것 같아서 한참을 지켜보니 곧이어 김민규가 컵을 내려놨다.

 

 

 

“...왜 안 물어봐요?”

 

“뭐를요?”

 

“제가 오늘 형 찾아온 이유랑 울었던 이유.”

 

“어... 말하기 싫을 수도 있을 텐데, 내가 물어보면 민규는 그냥 대답해줄 것 같아서요.”

 

 

 

전원우의 말을 들은 김민규는 한참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손톱 옆 살을 긁어대며 꽤 신중히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저러다 까지겠다 싶어서 손을 저지했다. 다쳐요. 깜짝 놀란 건지 쳐다보다가 별안간 밝게 웃는다. 웃는 모습이, 같은 상황 속에 놓여진 전원우의 그때와는 다른 얼굴이 너무 이질적이었다.

 

 

 

“사실 저 오늘 고백했다가 차였어요.”

 

“... ...”

 

“왜냐고 물어봐줘요.”

 

“...왜요?”

 

“제가 남자를 좋아해서.”

 

 

 

모든 시공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전원우가 상상했던 그 상황과 똑같아서. 잊으려 노력했던 과거가, 아물지 않은 상처가, 원하지 않던 순간에 갑자기 다시 찾아왔다. 같은 상황 속에 놓여진 김민규와 전원우는 너무 다른 것 같아서. 가까스로 데운 몸이 도로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형, 형도 제가 끔찍해요?”

 

“... ...”

 

“그럴 수도 있겠죠. 걔는 제가 이해가 안 된대요, 저는 저를 이해 못하는 건 당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근데 걔는 제가 걔를 좋아해서 애들한테 자기가 따를 당하는 것 같대요. 모든 게 내 탓이래요.”

 

“... ...”

 

“...내가 영원히 자기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대요.”

 

 

 

여전히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같은 상황에 놓였을 적에 전원우가 무슨 대답을 원했는지 생각해봤다. 뭐라고 해줘야 상처를 안 받을까. 함부로 말하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에 자물쇠를 걸었다. 전원우가 가족들한테 바라던 대답. 그게 김민규가 원하는 대답일지는 모르겠다.

 

 

 

“...갈게요, 오늘 죄송했어요.”

 

“잠깐, 잠깐만.”

 

 

 

아무 말 안 하고 듣고만 있는 게 부정적 의미라고 생각한 건지 김민규가 가려고 했다. 꼭 남 얘기를 듣지 않고 혼자 판단하는 것 같은데 그런게 아니라는 걸, 너의 예상이 틀릴 때도 있다고. 널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나도 남자 좋아해요. 근데 이건 잘못이 아니야, 오히려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난 건 행운이잖아요. 그 행운은 누군가가 나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거고, 그러니까 내 말은... 민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요.”

 

“원우 형...”

 

“혼자 고민하지 말고, 다 털어놓을 사람을 곁에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그 사람 내가 해줄게요, 오늘처럼 이렇게.”

 

 

 

전원우가 원했던 대답. 아픈 일도 힘든 일도 함께하자. 전원우 역시 어렸고 누군가에 도움이 필요했지만 호적상 가족들이란 틀을 지키며 자라온 전원우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적어도 그 안에는 없었다. 그 틀을 깨는 건 외부에 권순영과 최승철만이 유일했다. 비록 김민규가 원하는 대답이 아닐지라도 아픈 일 만큼은 털어놔도 되는 편한 형이 되어주고 싶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너의 외부가 되어줄게.

 

 

 

 

 

 

 

 

 

 

“민규는?”

 

“끝났겠지.”

 

“오늘 파티 할까.”

 

“그러던가.”

 

 

 

어째 김민규보다 더 신난 것 같았다. 그냥 셋이 지내던 중에 한 명이 더 늘었을 뿐인데 즐거움은 배가 됐다. 오늘은 김민규가 수능을 보는 날이었다. 수능날은 늘 그렇듯 추웠다. 이제 롱패딩 꺼내야지. 뭘 벌써 꺼내냐는 권순영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빠른가? 하지만 이번 겨울은 꽤 빨리 찾아오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전원우의 오피스텔 문을 벌컥 열었던 김민규는 한참 겨울잠 자던 전원우를 깨워 화장실로 밀어넣고 전원우의 책상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전원우가 감긴 눈으로 겨우 도시락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기어코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하마터면 늦을 뻔 했던 시험장에 가까스로 도착한 네 명은 한 명씩 민규에게 잘보고 오라며 엿이랑 사탕 같은 것들을 전해줬다. 마지막으로 전원우 앞에 선 김민규는 손을 내밀었지만 전원우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거라 머리만 긁다가 보냈다. 그게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줘야겠다고 마음 먹고 일을 했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었고 권순영은 벌써부터 파티 생각에 신나있는 듯 했다. 딸랑- 카페 문에 달린 종소리가 옅게 울려 퍼졌고, 그와 동시에 고개를 들었을 때는 코 끝이 벌게진 김민규가 보였다. 손을 비비며 들어온 김민규는 전원우를 향해 빨간 손을 붕붕 흔들었다. 전원우도 인사를 받아줬다. 일찍 마감한 카페를 나와서 저녁을 먹으러 간 넷은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원래 공부머리는 좋았던 김민규는 수능을 꽤 잘 쳐서 정시로 인서울을 넣을 거라고 했다. 그럼 꽤 잘 치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잘 치는 거 아닌가. 워낙 학교 생활도 괜찮았고 건축가를 할 거라는 명확한 꿈도 있었기에, 그런 김민규이기에 참으로 기특했다.

 

 

 

“민규야, 수고했어요.”

 

“넌 언제까지 존댓말 할 거야.”

 

 

 

김민규한테 한 말인데 돌아온 권순영의 말에 다들 전원우를 쳐다봤다. 벌써 두 달을 넘게 알고 지냈는데 말을 튼 권순영과 최승철과 달리 말을 트지 못했다. 김민규는 편하게 대했는데 전원우가 말을 못 놨다. 이유는 전원우도 알지 못했다. 왜 못하는 지 모르겠다. 김민규는 꽤 섭섭해 했지만 그걸 알아도 해결을 해줄 방법이 없었다. 진짜 말을 못 놓을 것 같았다.

 

 

 

“원우가 민규 존중해주고 싶나봐.”

 

“맞아 그거야.”

 

 

 

승철이 형의 말에 옳다구나 싶어서 빨리 대답했다. 민규는 그 모습에 겨우 웃음을 되찾았다. 같이 있으면 매일 매일이 행복했고 즐거웠다. 셋에서 넷이 된 것 뿐인데 이렇게 의미있는 삶일 줄 알았으면 진작에 챙겨줄 걸 그랬나 싶었다. 그 행복을 오래 지킬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치만 그 행복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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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월하입니다.

월간민원 첫 참여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