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bby] 뿔
2021. 1. 11. 23:46

주제:<자유주제>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외전)



진짜? 하고 눈이 반짝했다가, 이내 아냐…. 하고 시무룩해졌다. 뭐야, 한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둘러앉은 애들의 시선이 다 민규에게로 향했다. 민규는 고개를 저었다. 안 할래. 애꿎은 얼음만 스트로우로 푹푹 파댔더니 원우형 때문에? 그런다. 아니, 뭐 그냥…. 아닌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기도 애매해서 말을 흐렸더니 그 형 좀 이상해. 하고 한 명이 싫은 소리를 한다.

“자기가 연애 못 해서 그러는 거야? 왜 니 연애사에 그렇게 훼방질이야?”
“근데 그 형도 멀쩡하게 생겼잖아. 맨날 구부정하게 다녀서 그렇지 키도 크고. 왜 연애 안 한대?”

그러게. 민규도 궁금하다. 멀쩡하게 생겨서 자기 연애나 하지 왜 맨날 김민규 쫓아다니면서 소개팅이며 미팅이며 파토내는 데만 열을 올리는 건지. 파토내러 올 때마다 레파토리가 나날이 업그레이드 되니까 이건 뭐 예상도 안 되고 대처도 못하고, 갑자기 나타나서 개소리를 와르르 쏟는데 다 너무 그럴싸 해서 그런 거 아니라고 변명하면 오히려 민규가 이상해지는 상황이 되니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거다. 한 마디도 못하고 어버버 하다 보면 상황 끝. 민규는 안 씻는 애도 됐다가, 세상 둘도 없는 바람둥이도 됐다가… 이전에는 전원우의 구남친도 됐었다. 그때가 제일 황당했지.

“너 소개팅 같은 거 잡히면 그 형한테 다 얘기해?”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리는데 누가 문득 물었다. 응…. 고개를 끄덕이자 왜? 하고 모두가 눈이 커다래져서는 묻는다.

“몰라, 형이 어떻게 다 알아채고 물어보면 그냥 나도 모르게….”
“뭘 어떻게 다 알아채.” 

애들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너 소개팅 갈 때 엄청 힘주는 거 모르냐. 머리 이렇게 세우고 옷 막 그런 거 입고. 민규가 신경 쓸 때 하는 머리랑 착장을 얘기하는데 틀린 거 하나도 없다. 아… 그렇구나…. 이제야 큰 깨달음을 얻고 고개를 끄덕끄덕.

“원우형 몰래 가면 되잖아.”
“그래. 얘기 안 하고.”
“그래도 거짓말을 어떻게 해….”
“안 하면, 형이랑 살게?”
“아니, 그건 아니구….”
“솔직히 니가 뭐가 부족하냐, 어? 잘생겼지, 키 크지, 성격 좋지, 손재주도 좋고, 못 하는 것도 없고. 너 좋다는 애들 줄을 서야 맞는데 원우형 때문에 이 모양인 거 아냐.”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이번에는 원우형한테는 비밀로 해.”
“야, 우리 작전 짜자.”

테이블에 노트 하나가 펼쳐지더니 모두가 이마를 맞댔다. 김민규 연애성공작전. 그것보다는 전원우 차단 작전이 더 맞지 않냐. 누군가의 말에 타이틀 위로 줄이 죽죽 그어졌다. 전원우 차단 작전.















들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발소리를 죽여서 계단을 올랐다. 없지 않을까? 머릿속에 전원우의 강의 시간표가 바쁘게 굴러간다. 지금 수업 있는 것 같은데.

하면서 문을 열었는데 바로 보이는 소파에 누워있는 원우와 눈이 딱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서 아, 안녕. 하고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바로 돌아섰는데 야! 하고 바로 쫓아와서 뒷덜미를 낚아챈다. 너 또 어디 가. 애들 조언대로 오늘은 머리도 다르게 만졌고 옷도 다르게 입었는데 귀신 같이 알아채고선 그런다. 아무 데도 안 가! 뒷덜미를 잡아 당기고 있으니까 목이 졸려서 켁켁거리며 대꾸했더니 아무 데도 안 가는데 누가 이렇게 차려 입으래, 어? 하고 성질이다. 

“그냥 입었어, 그냥!”
“뻥치고 있네, 빨리 말 안 해?”
“왜 또! 와서 망칠라구 또!”

헉. 엉겁결에 쏟아내고선 황급히 입을 다물었는데 눈치를 챈 건지 아니면 원래 알고 있으니까 당연하다고 넘긴 건지 별 반응은 없다. 오히려 자기가 언제 망쳤냐고 바락바락. 암튼 따라오지 마! 몸을 틀어 손을 좀 뿌리치려는데 무식하게 힘썼다간 혹시 다칠까 싶어서 그러지도 못하고 뒷덜미가 잡혀서 몸이 반쯤 접힌 채 버둥거리는 꼴이 됐다. 

“싫어, 따라갈 거거든! 지구 끝까지 따라갈 거야!”

그러더니 풀쩍, 어깨를 짚어 등에 올라탄다. 갑자기 실리는 무게에 휘청, 자빠질 뻔 했는데 다행히 중심은 잡았고 반사적으로 손을 돌려 원우의 무릎 아래를 받쳤다. 보면 정말 대책이 없다. 어설프게 매달려 있다가 손 놓쳐서 떨어지면 크게 다치려고. 사람 불안하게. 가, 나도 같이 갈 거야, 빨리 가. 양쪽 귀를 잡고 방향 지시하듯이 잡아 당겨대는데 이걸 어떻게 떨어트려야 할지 모르겠다.

야, 이도저도 안 먹히면 그냥 나 죽었다 그래. 그 테이블에서 전원우 차단을 위한 여러가지 거짓말이 짜여졌는데 하필 그것만 지금 떠오른다. 야, 그래도 어떻게 죽었다고 그래. 거짓말을 해도 뭐 그런 걸 하나 싶어서 인상을 찌푸렸더니 내가 삼일 있다가 부활했다고 형한테 연락하면 되잖아. 그랬다. 그게 정말 제일 말도 안 되는데 지금 그것만 떠오른다.

“…오늘은 장례식장 가.”

거짓말을 하면 입안이 까끌까끌해지는 기분이다. 부자연스럽게 말한 것 같은데 아, 진짜? 하고 원우의 목소리가 누그러들었다. 슬며시 등에서 내려오는 걸 돌아보자 답지 않게 약간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구 장례식? 거기다 대고 차마 원우도 아는 민규의 동기 이름을 말할 수는 없어서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고등학교 동창. 입안이 자꾸 까끌까끌.

“어린애가 안 됐네….”

그걸 다 믿고선, 심각해진 얼굴로 손을 뻗어 구겨진 자리들을 정리해주었다. 턱 아래에서 옷깃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시선 한쪽에 걸린다. 하얗고 곧은 손가락. 거짓말인 거 알아채고 하던 대로 바락바락 소리 질렀음 차라리 마음 편했을 것 같은데 이러니까 민규가 더 안절부절 못 하겠다. 빨리 자리를 뜨는 게 나을 것 같다.

“내일 연락할게.”

오늘은 못할 것 같고, 내일 싹싹 빌어야지 싶다. 형, 이거 다 거짓말이야…. 민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우는 자꾸 옷깃만 만지작거렸다. 가. 한참 그러다가 손을 놓더니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갈게. 어떻게 돌아서긴 했는데 역시,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복도를 걸어가면서 돌아볼 때마다 전원우가 거기 서 있었다. 세상 측은한 표정을 하고. 그래,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교 동창이 죽었다는 거짓말은 좀 나빴다. 각자 자기 인생 잘 살고 있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하나둘 씩 머릿속을 스쳤다. 걔네한테도 죄 지은 것 같아….

“…형.”

계단 내려가고 건물 빠져나가면 그만인데 그걸 못하고 결국 멈춰서고 말았다. 이 불편함을 내일까지 가져가기엔 난 너무 착해…. 빨리 가. 사정도 모르면서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는 전원우.

“…뻥이야.”

딱 그만큼의 용기만 있다. 그 다음을 감당할 자신은 없고. 뱉어내듯 말하고선 후다닥 계단을 달려내려가자 야! 하고 저를 부르는 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린다. 내일 연락할게! 난간 사이로 당장 죽일 듯이 내려다 보고 있는 원우에게 말하고선 잽싸게 도망쳤다. 살면서 이렇게 빨리 달릴 일이 몇 번이나 있나 싶다.

아무튼 소개팅 장소에는 무사히 세이프. 너 이거 안 받으면 너무 아깝다고 난리난리더니 빈 말은 아니었다. 뭔가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소개팅과 미팅을 통 틀어 제일 감이 좋다. 고작 오 분 십 분 얘기했는데 말이 잘 통한다는 느낌이 딱 오는 거다. 이런 기분이 들면 민규는 마음 속에 거울 하나를 세워 본다. 쟤랑 나랑 팔짱 끼고 그 거울 앞에 서 보는 거지. 그림 좀 괜찮나?

지이잉.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한다. 끊임없이. 진짜 끊 임 없 이. 너 핸드폰 계속 울리는 거 같은데. 주머니에 숨겨놓는다고 될 게 아니다. 미안, 잠깐만. 사람 앞에 두고 그럼 안 되는데 어쩔 수 없이 꺼내들게 됐다. 볼 필요도 없다. 원우형, 원우형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들. 확인하는 와중에도 지잉지잉. 수없이 들어오는 메시지들은 다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오늘 소개팅 비밀이라며. 전원우한테 말했어? 전원우 또 시작이야. 니가 알아서 해. 너 어디있냐고 전화로 소리소리 지르고 난리났다.

왜, 무슨 일인데? 얼굴이 심각해졌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어, 아냐. 모르는 척 해야지. 여긴 원우랑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색깔이나 그런 게 너무 아기자기해서 지나가면서 간지럽다고 생각했던 카페. 아마 여기까진 안 올 것 같긴 한데.

민규야.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어, 미안. 핸드폰부터 도로 집어넣었다. 모르는 척. 모르는 척…. 입속으로 중얼중얼 외웠지만 그게 맘처럼 되지가 않고. 아, 혹시 그거야? 뭘 아는 것처럼 묻는 말에 응? 하고 얼굴을 마주했다.

“너 이렇게 누구 만나는 거 엄청 싫어하는 선배 있다며. 갑자기 나타나서 엉망진창 만들고 그런다고.”
“…얘기 들었어?”
“갑자기 나타나서 헛소리해도 미친놈이려니 하라구 그러던데?”
“…미친놈은 아니구.”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닌데 무슨 말을 저렇게 하나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불퉁하게 대답하자 쟤는 좀 당황한 눈치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얼른 수습을 하고선 그 선배는 왜 그러는 거래? 하고 말을 돌린다. 나도 몰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쯤 되면 전원우는 자기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긴 하는 걸까 싶다.

“너를 너무 싫어하나? 그래서 연애하고 그러는 거 배아파서 못 보고 그런 거 있잖아.”
“에이, 그건 아닐 거야.”

싫어할 리는 없지. 우리가 얼마나 친한데…. 그러는 동안 핸드폰은 끊임없이 울렸다. 도대체 몇 명한테 연락을 했길래 이 난리야. 한숨을 폭 쉬면서 핸드폰을 꺼내 테이블 아래에서 흘깃 확인했다. 전원우 너 찾아 다니나 보다. 미리보기로 뜨는 수십 개의 메시지 중 그 한 줄에 눈이 멈춘다. 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어디 있는지 모르면 그냥 손 놓고 기다렸다가 눈에 띄었을 때 패든가 죽이든가 하면 될 걸 전원우 성격이 그러지를 못했다. 온동네 헤집고 다니면서 사서 고생하고 있을 게 뻔했다. 맨날 그랬으니까. 가게라는 가게 다 뒤집어가면서 김민규 찾겠다고 돌아다니다 지친 얼굴로 겨우 나타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 속 터지게.

휴우. 두 번째 한숨을 쉬었다. 민규야. 부르는 걸 못 들어서 코 앞의 테이블을 두드리고서야 알아차렸다. 응? 하고 고개를 들자 쟤도 약간, 짜증 비슷한 게 난 모양이었다. 미안하긴 한데.

“나 전화 좀 하고 올게.”

일단 해결은 하자. 나중에 연락한다고 집에 가 있으라구 하든지. 내내 집중 못하고 핸드폰도 이렇게 계속 울려대면 쟤한테 제일 민폐였다. 어디를 헤매고 있으려나. 전화부터 해야겠다 싶어서 아예 카페 밖으로 나왔는데,

도로 건너편에 선 전원우가 보인다. 두 손으로 제 머리 양쪽을 막 두드려댄다. 생각, 생각, 떠올라라, 생각. 중얼거리는 게 안 들려도 들린다. 저 형은 진짜 왜 저렇게까지 할까?

너를 너무 싫어하나? 아니라고 대꾸하고 나왔는데 혹시 그런가 싶기도 하다. 것두 아주 많이 싫어야 이만큼 정성을 쏟아부을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원우가 고개를 들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치자 김민규! 하고 저를 크게 부른다. 냅두면 저 상태로 죽이네 살리네 고래고래 소리칠 거 같아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받으라고 손짓을 했더니 금세 받는다. 

-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귀 떨어지라고 소리부터 빽 지른다. 깜짝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트렸다가 다시 가져오는데 뭔가 복잡미묘한 기분이 확 몰려오는 거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건데. 그러는 형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

- 야, 나는!
“내가 누구 좀 만나는 게 그렇게 싫어?”
- 어! 싫어!
“왜?”
- 왜냐면!

말을 못한다. 찰나의 정적이 쏟아졌다. 형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님 진짜 내가 싫어서 그러는 거야? 질문이 머릿속에, 입안에 둥둥 떠다니는데 차마 곧이곧대로 묻지는 못하겠는 거다. 싫어서 그래? 물었더니 어, 이제 알았냐? 하면 어떡하지?

별 걱정을 다 한다. 몇 초 동안 머릿속이며 맘속이며 엉망진창으로 꼬였다. 그 질문은 못하겠고, 에둘러서 물어봐야겠다.

“형 나 좋아해?”
- 뭐래, 미친놈아!

핸드폰 안에서도, 밖에서도 전원우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린다. 안 좋아하나 봐. 싫어하는 거 맞나 봐. 갑자기 기운이 다 빠진다. 나는 이 와중에 걱정된다구 매너없이 자리 박차고 나왔는데 날 싫어한다니. 나쁜 사람이잖아. 어차피 횡단 신호가 떨어져서 전화를 끊고 걸어갔다. 성질 부리느라 귀가 다 빨개진 전원우가 건너에서 민규를 기다리고 있다. 나쁜 사람.

“그럼 나 싫어해서 그래?”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한다. 역시, 나쁜 사람.

























민규야. 눈앞에서 휘휘, 저어대는 손에 정신이 들었다. 강의 끝났어, 임마. 넋놓고 있느라 몰랐는데 둘러보니 강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저 하나다. 눈 뜨고 잤냐? 실없이 묻는 말엔 실없이 웃기만 했다. 애들 이따 당구치러 간다는데 너도 가자. 함께 강의실을 나서며 권유하지만 민규는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갈래. 피곤해. 

그 날 이후로 매일 매일 피곤한 상태다. 막상 집에 돌아가서 누우면 잠은 하나도 안 오는데. 뒤척거리다 보면 새벽 두 시, 세 시. 눈 감으면 계속 떠오른다. 뭐래, 미친놈아. 새빨개진 귀와 커다래진 눈과 아무 말도 못하던 입술 같은 게. 에이씨. 그래봤자 같은 동아리에서 한 일 년 잘 지냈던 것 뿐인데 그게 뭐라고 자꾸 신경 쓰이나 모르겠다.

연락은 고사하고 혹시 지나가다 마주칠까 싶어서 원우네 건물에서 제일 먼 길만 골라서 다니고, 동방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새삼 캠퍼스가 참 넓다. 전엔 아무 데서나 툭툭 잘도 나타나서 마주쳤는데 마음 먹으니까 한 번을 안 볼 수가 있고.

야, 민규야. 강의 끝나고 건물을 나서는데 누가 저를 부른다. 돌아보았더니 입구 근처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던 동아리 총무 선배가 손짓을 했다. 안녕하세요…. 통 얼굴을 안 비추니 잡으러 온 게 뻔해서 괜히 어깨가 쪼그라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자 뭔 일이야, 임마. 하고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넣는다.

“그냥 좀 바빠서….”
“어이구, 그러셨어요.”

가면서 얘기하자. 먼저 걸음을 옮기는 걸 따라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반걸음 쯤 뒤에서 쫓아가는 내내 이렇게 동방 갔다가 전원우를 보면 어떡하지, 그 생각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선배 저 약속이 있어서….”
“알겠어, 임마. 잠깐만 얘기하자구.”

다행히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넌 뭐가 그렇게 바쁜데? 걸으면서 핀잔처럼 묻는 말에 그냥…. 하고 어설프게 대꾸했다. 원우는 뭐가 그렇게 바쁘대? 툭 묻는 말에 민규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 해서 선배의 곁을 따라잡았다. 원우형 바쁘대요?

“걔도 동아리 안 나온지 한참 됐어. 연락하니까 바쁘다고 그러고.”
“아….”
“둘이 싸웠냐?”
“싸운 건 아니고….”
“싸운 건 아니고 그냥 니가 화났어?”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대답은 듣지도 않고 혼자 끄덕끄덕한다. 화난 거 아닌데…. 화가 난 거면 차라리 만나서 한바탕 했을 거 같다. 그것보다 더 복잡하다. 복잡하고 미묘하고. 화가 난다거나 밉거나 싫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못 보겠다.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느냐면 또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못 보겠다.

“우리가 뭐 사람이 엄청 많은 동아리도 아니고, 이리저리 다 빠져나가고 남은 거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 와중에 너네 둘 다 안 보이니까 엄청 허전하고 그렇더라.”
“…죄송해요….”
“니가 죄송할 거겠냐, 전원우가 잘못한 거 뻔한데. 걔가 너 오죽 괴롭혔어.”
“…그런 건 아니구….”
“어휴, 김민규 순둥이.”

선배가 손을 뻗어 민규의 뒷머리칼을 푸르르 흩트렸다. 원우하고 얘기 좀 해 볼래? 화해는 해야할 거 아냐. 영원히 안 볼 사이도 아니고. 고개를 끄덕이기는 하는데 시선은 점점 떨어져서 제 발치만 보게 된다. 만나도 되나. 만났는데 형이 싫어하면 어떡하지.

“낼 수업 끝나고 다 같이 보자. 원우도 내가 부를게.”
“…네….”

가라. 어느새 교문 앞까지 와서는 선배가 걸음을 멈췄다. 낼 봐. 다시 한 번 못을 박아서 네에…. 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내일….

내일, 원우형. 두 단어가 머릿속에 밤새 떠다녀서 한숨을 못 잤다. 알람을 끄고 일어나서는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늘, 원우형. 만나면 뭐라고 해?












단톡방 위쪽에 공지되어 있는 장소와 시간을 종일 확인했다. 오늘, 원우형. 일곱시, 원우형. 세 시간 후, 원우형, 두 시간 후, 한 시간 후, 십 분 후,

…전원우다. 계단을 내려와 무심코 가게 문을 열었는데 입구에 서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가방끈을 꽉 쥐고선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다. 불러야 할 거 같은데,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형. 한 마디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뭐해?”

고르고 고른 말이 이따위다. 김민규 멍청이. 뒤에서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는 휙 돌아보는 눈이며 입이며 멍하니 열려있다. 안 들어가? 마주 보고 있으려니 또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어서 원우를 지나쳐서 먼저 걸었다. 기운 빠져. 나 온다는 소리 못 들었나. 그렇게까지 놀랄 건 뭐야.

일부러 그랬는지 나란히 앉을 자리만 남아있다. 민규가 먼저 들어가고, 곧 옆에 원우가 앉았다. 안쪽 테이블들은 시끌시끌한데 여긴 적막하기만 하다. 같은 테이블 사람들은 일찌감치 자리를 떠서는 다른 데 가 있다. 침묵 속에 둘만 나란히 앉아서는. 흘깃 바라본 원우는 고개를 숙인 채 제 손톱만 뜯고 있다. 저거 못 하게 해야 하는데. 손이 나갈 것 같아서 주머니 안에서 주먹을 꼭 쥐게 됐다.

“…술 마실 거야?”

안 되겠는지 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병을 가져오며 원우가 물었다. 민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가 이내 후회했다. 마실 기분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한 잔은 받을 걸 그랬다. 까드득. 뚜껑을 연 원우가 제 잔을 알아서 채우고선 다시 묻지도 않고 병을 내려놓는다. 안주라곤 제대로 나온 것도 없는데 그걸 그냥 원샷. 그리고선 다시 잔을 채우고. 민규의 잔은 처음 세팅된 그대로인데 원우는 벌써 몇 잔을 물도 한모금 안 마시고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전원우가 그렇게까지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 김민규가 잘 아는데. 소주 한 잔 갖고 서너 번 나눠마시면서 왜 저러나 모르겠다.

역시 내가 싫은가 봐. 여기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싫은가 봐. 그런 생각이 드니까 확 울적해진다. 또 자작을 하고 내려놓는 소주병을 가져온 민규가 제 잔을 채웠다. 한 잔 같이 하고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해야겠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남의 맘도 모르고 속도 모르는 전원우는 그새 또 원샷을 했다. 도로 채우려고 병을 들었다가 비어있는 걸 보더니 아…. 하고 민규의 잔을 내려다 본다. 한 병 중에 겨우 한 잔 내가 가져온 건데 그것도 싫은가 봐…. 한 번 생각이 그렇게 기우니까 끝도 없이 간다.소주를 새로 시키고선 또 혼자 쭉쭉 마셔댄다. 

야, 너네 화해했냐? 이 분들은 또 언제 이렇게 술을 드셨는지 갑자기 나타난 선배들이 시끄럽게 물었다. 시끄러, 저리 가. 원우가 손을 휘저어 선배들을 내쫓는데 동작이 영 둔한 게 아무래도 애저녁에 취한 모양이었다. 네네, 꺼져드릴게요. 전원우, 김민규 오늘은 화해해라! 화해가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다들 민규의 어깨며 등을 팍팍 두드려댔다.

화해… 화해라는 건 뭘까. 내가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 걸까. 화해의 말은 커녕 술만 마셔대는 원우를 흘깃거리며 민규는 고민이 깊어졌다. 일단 아무 말이나 하면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되는 거 아닐까?

“…형.”

어렵게 입을 열었는데 못 들었는지 원우는 또 손을 뻗어 소주병만 찾는다. 눈앞에 두고 휘적휘적, 한참 헤매더니 겨우겨우 쥐고선 잔이 넘치는 것도 모르고 콸콸 채운다. 형. 더 마시면 진짜 안 될 것 같아서 급한 마음에 손목을 쥐었더니 그제야 고개를 돌려 민규를 봐준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흐릿해진 눈으로 민규를 바라보더니 느리게 고개를 돌리며 손을 털어내곤 잔을 비운다.

나쁜 사람…. 언젠가부터 머릿속에 있던 말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기분이 자꾸 가라앉는다. 화해 같은 사치는 이미 물 건너간 것 같지.

풀썩. 갑자기 원우가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형. 깜짝 놀라서 어깨를 쥐어 흔들자 꾸물꾸물 고개를 든다. 형, 괜찮아? 그러게 좀 살살 마시지 왜 그렇게 달려서는. 몸을 가누질 못하고 흔들리는 걸 단단히 붙잡았다. 집에 가자, 데려다 줄게. 다시 엎어지려고 하는 걸 억지로 붙잡아 세워두고선 말했더니 어? 하고 인상을 쓴다. 머? 발음도 제대로 안 되고, 눈을 자꾸 찡그려대고. 집에 가자구. 데리고 가야할 것 같은데 도로 눈을 감는다. 형. 일어나, 자지 마. 어떻게든 깨우려고 자꾸 흔드니까 아이씨. 하고 신경질이다. 갑자기 손을 뻗어서 어깨를 잡더니,

와락, 끌어안는다. 어지간히 세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가슴팍이 아프게 부딪쳤다. 취기에 열이 올라서 뜨거운 몸이 무겁게 기대어 왔다. 안 들려, 병신아…. 귓가에서 작게 속삭이는데, 숨에 가득 알콜이 섞여 있어서 한숨이 절로 났다. 집에 가자구. 그래도 뭐 어떡해, 내가 챙겨야지. 등을 다독이자 고개를 끄덕인다. 가자….

알아서 간다고 난리를 치더니 계단을 거의 기어서 올라가선 건물 현관에 주저앉아 버린다. 금세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들어버리는 걸 억지로 깨우자 부스스 고개를 들어 민규를 올려다 보았다. 어, 민규다. 처음 본 것처럼 반가워하고.

근데 좀, 기분이 나아지는 거다. 술 취해서 반가워하는 건데 민규다. 하더니 헤헤헤. 하고 웃으니까 울적하던 게 스르르, 녹았다. 집에 가자. 데려다 줄게. 팔을 붙잡아 일으키려니까 여기가 집인뎅. 하고 헛소리를 한다. 여기서 주무시면 얼어죽거든요. 억지로 잡아 당기자 휘청거리며 일어나다가 도로 주저앉는다.

“나 못 걷겠어….”
“…….”

팔꿈치께를 쥐고 있었는데 팔이 흘러내리면서 손목을, 다음엔 손을 잡게 됐다. 놓으면 그대로 길바닥에 쓰러질까 봐 꽉 쥐었더니 한쪽 손은 민규에게 맡겨두고선 또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푹 파묻는다. 형. 뜨끈뜨끈한 손을 잡은 채 원우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업어줄까?”

그래야지 집에 가겠다 싶다. 푹 숙이고 있는 정수리에 대고 물었더니 반짝, 고개를 든다. 응, 업어줘. 고개를 끄덕끄덕끄덕.

그래서 업었다. 업을 때마다 느끼지만 좀 너무 지나치게 가볍다. 키는 많이 차이 안 나는데 몸무게는 못 해도 십 키로는 나지 싶다. 한겨울이긴 해도 이만큼 업고 걷는데 땀도 별로 안 나고.

“…형.”

한참 걷다가 불렀는데 조용하다. 자? 다시 부르자 아니이. 하고 대꾸를 하는데 목소리에 잠이 한가득이다.

“…나 싫어해?”

이딴 질문, 어차피 원우는 내일 되면 다 까먹을 것 같으니 물어나 본다. 되게 고민하다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해서 고개를 돌려 살피게 됐다. 어깨 위에 턱을 올리고 있어서 고개를 돌리니까 바로 얼굴이 가깝다. 혀엉. 다시 부르자 으응. 하고 잠결에 대답을 하고.

“나 싫어하냐구.”
“아니, 나 너 좋아하는데?”
“좋아하는데 나한테 왜 그랬어?”
“뭐얼?”
“내가 누구 좀 만나려고 하면 다 훼방 놓고 그랬잖아. 애들이 그거 형이 나한테 심술 부리는 거래. 내가 연애하는 거 배아파서.”
“그런 거 아닌뎅….”
“그런 거 아닌데 왜 그랬어?”
“…내꺼니깐.”
“…응?”

이게 무슨 소리야. 모기만 하게 말하는 통에 잘못 들었나 싶어서 걸음을 다 멈추게 됐다. 뭐라구? 다시 물었더니 아이씨이. 하고 등 위에서 꿈지럭꿈지럭, 자세를 고친다. 어깨를 좀 더 단단히 끌어안고선 목덜미에 이마를 깊게 기대어 왔다. 뜨거워. 닿은 자리가 쭈볏쭈볏, 괜히 긴장하게 된다.

“내꺼라구…. 안 줄거야….”
“……형 꺼야?”
“응, 내꺼야….”

술김에 헛소리 하는 건가 싶었는데 영 헛소리는 아닌 건지 계속 내꺼. 내꺼야…. 하고 중얼거린다. 안 줄거야. 내꺼야. 안줘. 내꺼. 그러니까,

“아무나 만나지마….”
“…….”
“여자 만나지 말구… 남자도 안 돼. 아무도 안 돼. 내꺼야, 안 돼.”
“…….”
“안 돼애….”

갑자기 우는 소리를 한다. 울어? 뜬금포를 계속 쏘더니 울기까지 하니까 당황스럽다. 내꺼야아. 내꺼란 말이야아. 대학가에 술집이 밀집한 골목에서 다 큰 남자애가 다 큰 남자애한테 업혀서는 내꺼 타령을 하면서 이내 엉엉, 울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이상한 그림. 못 줘, 안 줘. 싫어, 내꺼야. 안 돼. 아무도 만나지마. 연애하지마. 내꺼야. 내꺼란 말야. 바둥바둥하는 통에 민규는 약간,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일단 되는 대로 등에 업은 채 둥기둥기, 갓난아기 달래듯 흔들어댔더니 그게 뭐라고 엉엉 울다가 슬슬 그친다. 내꺼…. 눈물콧물에 엉망으로 젖은 얼굴을 민규의 옷에 아무렇게나 닦아내더니 염불처럼 중얼거리면서 목덜미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그러더니 거짓말 같이 이내 새근새근 잠이 들어서는 고른 숨을 내쉬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지고 다시 평범해진 거리에 한가운데에서 한겨울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민규는 원우를 업은 채 아주 오랫동안 서 있었다. 형 꺼야…?

나 너 좋아하는데? 그 얘기가 그 소리였어…? 그래서 그랬다는 거야…? 뭔가 너무 간단한데 너무 어렵다. 익숙하게 원우의 자취방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자마자 잠깐을 못 서 있고 와당탕, 바닥에 쏟아지는 원우를 뒤집어서 점퍼를 벗겨내고, 양말을 벗겨내고 그러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형꺼라서 그랬단 말이야? 나를 좋아해서? 양말을 쥐고선 멍하니 있는데 좀비처럼 일어난 원우가 훌훌 옷을 벗더니 팬티 바람으로 비척비척, 침대로 향했다. 이불도 안 덮고 맨몸으로 풀썩 엎어져서는 고롱고롱 자는 걸, 민규는 원우의 양말을 쥔 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

일단은 집에 가야겠다. 정리가 안 돼. 술은 전원우가 다 퍼마셨는데 취한 건 김민규인 것처럼 뇌가 멈췄다. 원우가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들을 한쪽으로 모아놓고선 이불이나 덮어주려고 가까이 갔는데,

같이 잔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때 기억들이 막 나는 거다. 전원우의 잠버릇. 자면서 이불이란 이불은 다 차내고선 춥다고 파고들던 거. 어깨부터 발끝까지 이리저리 엉켜서 다 달라붙어야지만 춥단 소리를 안 했다. 한여름에도 그랬고 한겨울엔 더 심했고. 그것도 다,

형 꺼라서 그랬단 말야? 나를 좋아해서? 정말 너무 간단하고 너무 어렵다. 자긴 다 쏟고 나니까 마음이 영 편한지 곤히 잠든 원우를 내려다보면서, 생각은 집에 가자, 집에 가자, 하는데 발은 딱 붙은 채였다. 집에 가기엔 좀 늦었지…? 시계를 찾았는데 개뿔, 막차까지 아주 한참 남았다. 으음….

피곤한 거 같아. 새삼 여기까지 전원우를 업고 온 걸 상기했다. 그래, 맞아. 나 형 업고 왔잖아? 힘들어서 안 되겠다.

자고 가야지. 생각이 떨어지자마자 후다닥 옷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옆에 눕기 무섭게 아니나다를까 추워엉. 하고 원우가 감겨온다. 만족할 만큼 팔다리를 감고났더니 춥다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형. 자는 거 알면서도 불러본다.

“…형 꺼야?”
“으응….”

내꺼… 안 줘….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면서 품을 파고든다. 갑자기 헛웃음이 막 났다. 깰까 싶어서 크게 웃지도 못하고, 짤막한 웃음을 여러번 터트렸다. 형꺼라는 거지. 그렇다는 거지. 좀 덜 웃고 싶은데 입꼬리가 자꾸 올라간다. 그래서 그랬구나. 되게 많은 게 설명된다. 그럼 내가 소개팅하는 게 그렇게까지 싫을 수도 있지. 내가 연애하면 싫겠지. 나는 형꺼니깐. 형이 나를 좋아하니깐. 그게 다 질투한 거였구나? 세상에….

귀엽잖아….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참는 대신에 원우를 꽈악 끌어안았다. 숨 막힐 법도 한데 투정도 안 하고 고롱고롱 잘도 잔다. 역시 나를 좋아하니까.












“그래놓고선 아침에 일어나선 쌩깠잖아.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

그랬었다. 컵라면 두 개를 사이에 두고선 아무 말도 안 했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어서 지금이 꿈인지 어젯밤이 꿈인지 분간이 안 돼서 도로 자는 걸 택했지. 얘기를 듣는 내내 원우는 눈이 커다래져서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야,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됐냐. 해 좋은 날 카페에 마주 앉아 민규는 과제를 하고, 원우는 책을 읽다 말고 문득 던진 물음에 더듬다보니 저게 시작이었다. 술 취해서 내꺼라고 울고불고 했던 날. 그 다음 날 다시 한 번 더 술을 마시고 뽀뽀를 했다. 먼저 뽀뽀한 건 민규였는데 그리고선 바로 원우가 키스했고, 그 다음부터는 뭔가 모든 게 물 흐르듯이 흘러서 이렇게 이런 사이가 다 됐고.

“…내가 그랬다고?”

안 믿기는지 안 믿고 싶은 건지 몇 번을 다시 묻는다. 그랬다니까. 그날 밤에 형이. 다시 설명해주려니까 야, 이거나 먹어. 하고 되는 대로 앞에 놓인 케이크를 포크로 푹 찍어서 민규의 입에 밀어넣었다. 꿈꿨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런다. 꿈이 아니라. 케이크를 우물우물 씹으며 설명을 덧붙이려는데 됐어, 그만해. 하고 귀를 막는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그랬을 리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내가 진짜 그랬다고? 하고 또 물었다.

“그랬다니깐! 내꺼라구 막,”
“너 아니고 티켓 얘기였겠지. 그 티켓이 내꺼라구.”
“아냐, 나라고 그랬어.”
“내가 그랬다고?”
“그러진 않았나?”
“그랬을 리가 없어. 나는 나를 잘 알아.”

원우가 계속 고개를 저었다. 아유, 정신사나워.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원우의 얼굴을 붙들어 세웠다. 손바닥에 양쪽 볼이 눌려서는 얼굴이 다 찌부러졌다. 귀여워. 예전엔 그냥 선이 얇은 무섭게 생긴 형이었는데 요샌 별 게 다 귀엽다. 볼을 꼬집어 흔들었더니 놔라. 하고 인상을 팍 쓴다. 넵. 그럴 땐 말을 들어야 한다. 얼른 손을 놓고선 물러나서 도로 앉았다.

“티켓도 형꺼고 나도 형꺼고 그랬나부지, 그럼 뭐.”
“그만 해.”
“왜, 부끄러워?”
“죽는다.”

눈에 약간 진심으로 살기가 든다.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곤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펜으로 끄적끄적, 필기를 하면서 자꾸만 원우를 살피게 된다. 어지간히 충격인지 책은 아예 덮어놓은 채다. 말도 안돼. 어지간히 되새김질을 하는지 한참 가만 있다가 한 번씩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 펜을 놓고 다시 부르자 왜. 하고 눈을 치켜뜬다.

“이제 진짜 형꺼 됐잖아. 형도 내꺼 됐으니까 괜찮아. 그만 생각해.”
“…죽을래?”
“아닝, 살을래. 형이랑 오래오래 살건뎅?”

이런 말장난 옛날 같았음 매 한 대 더 불렀겠지만 요샌 아니다. 메롱. 하고 혀까지 쏙 내밀었는데 더 뭐라고 하질 않고 그냥 웃고 만다. 살고 싶음 과제나 빨리 해. 그러면서  책을 다시 든다. 그만 쳐다보구. 한마디를 덧붙이고선 책 아래로 쏙, 얼굴을 숨기는데 볼이 발그레한 게 보인다. 역시, 형은 나를 좋아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