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호흡 증후군
hyperventilation syndrome, 過呼吸症候群
동맥혈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정상 범위(37~43mmHg) 아래로 떨어져 호흡곤란, 어지럼증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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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자란 집에서 이사 한 번 가지 않아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로 허물없이 지내온 강아지는 대학생이 된 제 시점에서도 그저 철없는 옆집 꼬마였다. 아직까지도,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교복을 벗고 나서부터는 아주머니의 부탁으로 겸사겸사 과외도 해주었다. 자기는 고삼이 되기 전에 지구가 멸망할 줄 알았다는 둥 믿을 수 없다며 자꾸 본인 볼을 꼬집고 아프다고 징징대는 둥 한적하기 그지없는 서점의 아침에 조용한 소음을 더했다. 독서에 방해가 됐는지 인상을 쓰며 제게 향하는 눈초리 덕분에 머리를 콩 쥐어박지 않을 수 없었다. 좀 조용히 해. 아니, 형. 내가 고삼이 됐다니까? 그래 너 불쌍해.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혀엉이라며 말꼬리까지 빼며 온갖 꼬리란 꼬리는 다 처질 태세로 쳐다봤다. 곧 있으면 없던 개 꼬리까지 만들어서 나 삐졌어요라고 광고해댈 모양이었다. 한숨을 쉬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더니 눈앞에서 붕붕거리는 꼬리가 아른거리는 착각이 일었다. 개새끼도 너 같은 개새끼는 없을 거야. 결국 문제집은 제가 다 고르고 입에 바닐라 라떼를 하나 물려줬더니 얌전히 따라왔다.
성인이 되어서는 자취하려고 원룸에 자리 잡아 이젠 옆집 꼬맹이는 아니었지만 십몇 년을 봐온 연유로 기억 속의 김민규는 거기에 머물렀다. 가끔 친구들과 피시방에 다녀온 건지 게임 얘기를 하는 민규를 보면 조금 낯설었다. 모든 면을 다 알기엔, 그래도 남이니까. 생각에 잠겨 빨대만 잘근 씹어대는 절 드디어 본 건지 친구들의 어깨를 툭툭 쳐가며 짧게 인사를 나누고 쫄랑 앞으로 다가왔다. 말이 좋아 쫄랑이지 폼은 어릴 적 덩치를 생각하고 주인에게 덤비는 대형견 정도 돼 보인다.
이건 제 생각해서 산 건가 봐요?
야, 그거
행동보다는 빠르다고 생각했던 말마저도 강아지에겐 한참 늦었던 거다. 제가 마시던 음료를 뺏어 먹더니 잔뜩 인상을 쓴다. 형은 아이스티 마실 것처럼 생겼으면서 왜 맨날 이런 거 마셔요라고 말하면서도 제 취향을 이해해보려고 노력을 하는 건지 한 모금 더 마시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건넸다. 남의 거 탐낸 벌이야.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자연스레 제 발걸음 속도에 맞춰 걸어준다. 아직 과외할 시간도 안 됐는데 자취방으로 따라왔다. 하다 하다 자기 집 마냥 도어락까지 풀어버리길래 노려봤다.
그렇게 바라보면 위협적일 것 같아요?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지만 왠지 쟤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배고프다며 널브러지는 개새끼에 줄 게 라면 밖에 없다고 찬장을 열어 종류를 읊었다. 물로 배 채우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끓여먹으라는 말도 잊어버리지 않고. 한참 핸드폰을 보며 밍기적거리고 있었던 민규는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물을 끓이고 있었다. 자취생의 식량을 거덜 낼 생각인지 라면을 세 봉지나 꺼내서 뜯길래 다가가서 등짝을 때렸다. 형이 뺏어 먹을 거 생각해서 세 개. 강조하는 손가락 세 개에 허전한 배는 합리화 당하고 만다. 옷소매로 냄비 손잡이를 잡고 오길래 다 있는 곳에서 산 작은 상 위로 전공책을 올렸다. 멀뚱히 바라보는 눈빛에 고갯짓으로 책을 가리켰다. 그제서야 아, 하고 내려놓고는 수저를 챙겨온다.
형은 연애 안 해요?
콜록. 재수 없게도 저런 소리를 해오는 표정은 순수했다. 인상을 써가며 기침을 했더니 금방 물을 떠와 건넨다. 눈에 차는 사람도 없고 학점 챙기면서 과외해주면 시간도 없다 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제법 진지했던 건지 아무런 대꾸 없이 라면만 먹고 있었다. 이상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제게 시선을 꽂은 강아지의 눈망울이 또 멍하게 만든다. 너 강아지 같다고. 머리를 두어 번 쓸어줬더니 웃으면서 마저 라면을 먹는다. 갑자기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여워서 그래, 그렇지. 우리 강아지 귀엽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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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엔 모! 닝콜 필수던 내ㄱ
이렇게 이른 아침에는 아직도 필수다. 핸드폰 속 가장 발랄한 노래이자 상황과 딱 들어맞는 노래로 해둔 모닝콜에 부스럭대며 기지개를 켜자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앉은 채로 이불에 파묻혀보지만 한기는 가시질 않는다. 어떻게 수능날만 되면 귀신같이 추워지는지 모르겠다. 시험 스트레스로 인한 수험생들의 세타파 때문일 것이라며 근거 없는 낭설로 생각을 갈무리 지었다. 강아지가 들으면 무슨 소리냐며 반박을 해올 테지만, 아무렴. 머리를 한 번 헤집고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현관문 앞에 서서 놓고 온 건 없는지 생각을 하다가 문을 열었다. 목에 두른 목도리에 코까지 묻고 도착한 교문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숨소리가 바뀌길래 천천히 오라는 말을 하고 끊었다. 이 근방이었는지 얼마 안 돼서 도착한 강아지에게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기분이 좋아진 건지 덧니까지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집에 들어가서 자고 있을 테니까 끝나면 와.
이젠 품에 넘치는 몸을 끌어안았다. 잘 보고 올게요. 손을 흔들며 들어가는 뒷모습이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어떤 학생이 내린 택시에 올라탔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집에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몸을 던졌다. 오늘은 자체 휴강. 한 번쯤은 괜찮겠지. 그렇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직감적으로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비죽거리며 커튼을 넘어오려는 땅거미...를 배경 삼아 저를 바라보고 있는 김민규였다. 덤덤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왜 그러고 있어.
형이 너무 곤히 자고 있길래 깨우기 미안해서요. 무단 침입은 아니니까 봐줘.
시험은 어떻게 했어.
잘 봤죠, 물론 시험지를.
뭐?
아, 장난이요 장난. 자랑할 수 있을 만큼은 봤어.
진짜지.
응.
근데 너 자꾸 말 짧아진다? 제가 언제요? 결국 베개로 한 대 얻어맞았지만 장난기 서린 웃음은 그대로다. 아직도 하고 있는 목도리를 빤히 바라보자 그제서야 풀어서 침대 구석에 올려둔다. 외투까지 벗더니 그대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말 안 했던가, 너 강아지인 줄 아는 개라고. 꽉 차는 침대에서 공간을 확보하려고 움직였더니 이제는 안아오기까지 한다. 나오든지 팔을 풀든지 둘 중에 하나 하라니까 장판보다 더 따뜻한 게 형이라며 헛소리를 해온다.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고 해도 고동색의 눈동자가 전하는 너울이 심하게 넘어왔다. 진원지가 어디일까. 동공에 비치는 제 표정은 금방 색채를 잃어갔고 정갈한 호흡만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눈을 피하려고 고개를 숙였더니 뒷머리를 감싸온다. 얘가 오늘 왜 이래.
솔직하게 말해, 시험 말아먹었지.
에이, 시험 못 본 걸로 형한테 이러진 않죠.
그럼 뭔ㄷ,
눌러 담았던 거 쏟아내는 중.
숨이 꽉 막혔다. 민규야. 네, 형. 나 좀 놔줘. 끝끝내 버티는 통에 관뒀다. 너무 티 난다. 오래 봐와서 생긴 익숙함에 내포된 감정과 사랑을 착각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마냥 귀여운 동생으로밖에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갑작스럽게 다가오면 아직 준비가 안 돼서 받아주기 힘들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줘야 하는데. 마음은 생각과 다른 건지 굳게 닫혀서 열릴 생각을 안 하는 입이 원망스러웠다. 생각을 떨치고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게 딴에는 부비적거리는 모양새로 보였는지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 좋으라고 한 거 아닌데. 저 좋을 대로 생각할게요. 뭐가 그리 좋을까. 나는 알다가도 모르겠는데 지금. 눈동자는 물에 잠겨 죽일 듯이 파도가 높게 일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다 든다. 여태껏 제게 살갑게 군 것도, 연애 안 하냐고 물어왔을 때도 사실은 다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구나. 착각인 게 오히려 낫지 않을까 싶어서 여전히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민규에게 물었다. 나 좋아하냐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꾸 웃으니까 되려 애가 된 기분이다.
그만 웃으라고.
좋아해요.
...
좋아한대도.
반복된 그 한 마디가 뭐라고 잠식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꽉 끌어안았다. 이대로 숨이 막혀서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콩콩콩. 심장 마디에 크레센도를 그린 것 마냥 점점 크게 뛰어대는 소리는 곧 겹쳐서 울렸다. 아찔한 악장은 싸늘함을 등줄기에 태웠고 타의로 과하게 들이켜진 숨은 내뱉는 방법을 지워버렸다. 더 이상의 호흡은 허락되지 않았다.
... 나도, 그런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