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리포트] 그 가려움이 사랑이었음을
2021. 1. 11. 23:43













서늘한 바람이 소복히 불어오는 아침.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청명해지는 하늘을 보느라 하루가 가는 줄 모르던 날들. 
이맘때 쯤이면 네가 눈부시게 생각난다.




그 가려움이 사랑이었음을 
w. 마이너리티리포트




우리의 시작은 너였다.




너는 갑자기 나타났다. 2학년 2학기. 고등학교 시절을 절반을 보내고 나머지 절반을 무거움에 절어 살 걱정으로 온몸이 뻣뻣해져오던 때. 이제 계절의 절반이 여름이라고, 숨쉬기도 버거울만큼 뜨거웠던 날들이 절기가 바뀌자 신기하게도 선선하고 맑은 바람이 부는 살만한 날씨가 되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배가 부르고 더워서 짜증이 나는 게 아니라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노곤노곤 잠에 빠지던 그저 그런 날 중 하나였다. 그날의 너는 선명하다. 

안녕.

너는 빈 자리였던 곳에 너를 채우며 인사했다.

나는 전원우야. 2학기부터 너 짝궁. 반가워.

마치 처음 만나는 친구에게 하듯, 2학기치고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인삿말로 너는 나타났다. 



전원우는 1학기를 통째로 결석했었다. 나중에 건너건너 듣기로는 심장병이라던가. 어릴 때부터 너를 괴롭히던 지독한 병은 키가 자라고 몸이 커지며 성장하는데 무리를 주어 자주 기절하고 힘들어 했다고 했다. 체육 수업도 듣지 못하고, 수련회나 수학여행 같은 건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다. 

어차피 체육은 땀나고 귀찮아서 싫어. 근데 수학여행 못 가본 건 좀 억울하다. 수학여행 가기 전에 수술하고 싶었는데, 하필 그 때 쓰러지는 바람에. 

결석하는 동안 3번에 걸친 대 수술을 했고, 그 때문에 가슴팍에 한 뼘이나 되는 상처가 났다며 네가 울상을 짓는 걸 보면서 나는 어떻게 했더라. 아마 웃었던 것 같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너와 나는 나란히 앉아 종종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태어날 때부터 많이 아팠고, 여태까지 출석한 일수보다 병원 입원한 날수가 더 많다고 했다. 처음에는 입원하는 게 너무 싫어서 병원에서 도망치기도 몇 번 했었고, 그렇게 도망갔으면 뭐 재미있는 일탈이라도 해봤어야 되는데 오락실이나 피씨방같은 데를 좀 돌다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곤 하는 시시한 탈출이었다고 했다. 같이할 친구라도 있었으면 더 재밌었을 거라고 너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중학교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검정고시를 봤고, 좀 건강해진 것 같아 다니기로 한 고등학교는 입학한 지 두 달이 채 안 되어 쓰러지는 바람에 학교에 대한 추억이 거의 없다고 했다. 1학년 1학기 때 수술을 했으면, 출석 일수가 모자라서 진급할 수 없지 않느냐는 나의 곤란한 질문에 전원우는 학교 졸업이 목적이고, 아빠가 부자라 괜찮아. 라며 헤헤 웃었다. 그럴 때면 나는 가슴팍을 긁적였다. 

네가 웃을 때면 여기, 명찰이 달려있던 가슴팍이, 이맘께가 지독히 간질거리곤 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척, 그도 여의치 않을 때는 괜히 잘 달려있는 명찰을 확인하는 척, 슬쩍슬쩍 옷깃을 당기며 살갗을 문지르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긁어도 너를 보면 그 간지러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너인줄 몰랐다. 내 왼쪽 가슴에 살포시 내려앉아 요란스레 방아질을 하는 게 너인줄 까마득 몰랐다. 




사실 너는 그 시절 고립되어 있던 나에게 먼저 손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들 먹고 살만한 이 동네서 유일하게 못 먹고 사는 나를 영악한 아이들은 공기처럼 대했다.낡고 해진 교복에 껴입을 겉옷마저 변변찮은 가련함은 둘째치고, 공부도 고만고만, 운동도 고만고만. 티나지 않게 살아가려는 부단한 노력 덕분인지 원래 그 정도일 뿐인지 특출난 것 하나 없는 나를 애써 친구로 삼으려는 아이들은 없었다. 너는 유일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인사하고, 말을 걸고, 사람처럼 대해 주었다. 나는 그게 고마웠다. 




학교 매일 매일 오면 좋을 줄 알았는데. 이것도 지겹구나. 
지겨워? 
응. 가만히 앉아서 몇 시간씩. 나는 무슨 소린지도 모르는데. 

하도 학교를 띄엄띄엄 다니다보니 기초가 하나도 쌓이지 않아서 수업 시간에 졸지 않고 버티는 게 고역이라던 너는 필기도 하고 간간히 수업에 참여도 하는 나를 보며 신기하다고 했다. 차라리 집에서 책 보고 애니메이션 보고 하는 게 더 재밌겠다고 했다. 그것도 일년 내내 질리도록 해서 지겹지만. 

아, 딱 하나 재미있는 건 있네. 
뭔데? 
너랑 이렇게 얘기하는 거. 

그 말에 내가 뭐라고 대답을 했더라. 그냥 얼굴이 붉어졌던가. 다음 시간 숙제나 물으며 말을 돌렸던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 네가 조금 골이 났던 건 기억이 난다. 그런 얼굴도 할 수 있구나, 담담하게 널 봤던 나와 달리 너는 입까지 부루퉁 나와서 한 시간 내내 말을 걸지 않았다. 이 날이 또렷이 기억나는 건 이 다음에 네가 내게 이렇게 물었기 때문이었다. 

민규야. 우리 놀러갈래? 

여태까지 누가 나에게 먼저 "놀자"는 말도 꺼내본 적 없었던 터라 나에게는 생소한 그 말이 퍽이나 반가웠다. 더 따지지도 않고 바로 되물었다. 

언제? 
음... 내일. 

내일이면 토요일이었다. 

뭐하고? 
너 놀이기구 타는 거 좋아해? 
아... 아마? 
그럼 놀이기구 타러 가자. 나 엄청 스릴있는 거 해보고 싶어. 

놀이기구는 타본 적 없지만 친구랑 처음 노는 거라면 뭐든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덜컥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럼 11시까지 놀이공원 앞에서 만나. 그 말에 우습게도 설레 버렸다. 




너처럼 나도 수학여행이고 소풍이고 제대로 다녀본 기억이 없다. 아이들 말마따나 없는 집 자식이니 저들과 어울리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을 주워듣고는 이후로 자진해서 참여하지 않았다. 애들이 제주도니 놀이공원이니 놀러 다니면서 사진 찍고 저들끼리 추억을 쌓는 동안 나는 학교에 나와서 3시까지 자습을 하다가 집으로 귀가했다. 매년 나처럼 빠지는 애들은 두엇씩 있었다. 그러나 그들마저 저들끼리 어울리며 놀았다.  




일찍 왔네. 

놀이공원 개장도 하기 전부터 와서 기다린 나와 달리 11시에 꼭 맞게 도착한 너는 주머니를 뒤져 티켓 두 장을 짠! 하고 꺼냈다.  

아빠가 친구랑 놀러 간다니까 이거 줬어. 

네가 나에게 건넨 티켓이 팔랑팔랑. 입구를 지나며 직원이 매어주는 팔찌도 달랑달랑. 하얀 면티에 노란색 가디건을 받쳐입고 귀엽게 목에 손수건도 두른 네가 내 마음을 말랑말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너는 기념품을 파는 곳 앞에 멈추어 서서 이것 저것 뒤적였다. 미키마우스 머리띠를 하나 집더니 머리에 쓰고 헤헤 웃었다. 거울에 이리 저리 비춰보던 너는 대뜸 미니마우스 머리띠를 내 머리에 씌웠다. 잘 어울린다. 어색해서 빼려는 내 손을 붙든 네가 이거 오늘 하고 있어야 돼! 라며 당부했다. 좋아하는 네가 귀여워서 내버려뒀다. 


의외로 너는 놀이기구를 잘 탔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오전부터 와서 그런지 제법 많이 타고 다닌 것 같다. 천천히 위로 올라가다가 멈춰 서서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도, 공중을 몇 바퀴나 뱅글뱅글 도는 것도, 시원한 물줄기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도. 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신나게 즐겼다. 바이킹을 탈 때 너무 무서워서 눈도 뜨지 못하고 안전바만 붙들고 있는 걸 옆에서 마구 웃으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실컷 소리를 지르고 내려와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웃음이 났다. 네가 즐거워하는 걸 보니까 웃음만 났다. 



곧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는 지 하늘이 어느 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츄러스를 하나씩 사서 들고 뜯으며 벤치에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구경했다. 힐끔 본 너는 정말 개운한 얼굴이었다. 

"좋다. 진짜." 
"그렇네." 
"민규야. 나 할 말 있어." 
"뭔데?" 

나를 보는 너의 눈빛이 새삼 진지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할 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너를 보면, 민규야. 여기가 따끔거려." 

네가 너의 심장께를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나는 내가 아파서 그런 줄 알았어. 근데 아니었어. 너만 보면 그래. 첫눈에 반한다는 거. 그런 건가봐. 그래서 너한테 말을 걸었는데, 네가 너무 착하고 좋았어. 그래. 맞아. 

"네가 좋아." 
"음, 음료수 좀 사올게. 목이 마르네." 

너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자리를 피해 버렸다. 나는 너의 삶을 나처럼 나락으로 끌어내리고 싶지 않았다. 외면받는 삶을 살게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긍휼히 여기는 너에 대한 최선의 배려였다. 너를 무시하고, 너의 마음을 외면하는 게. 고작. 





한참 주변을 배회하다가 겨우 네가 좋아하는 콜라캔을 사들고 우리가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데,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서 웅성웅성 떠들고 있었다. 여기를 지나가야 네가 있는데.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지나치는데, 네 얼굴이 스쳤다.

원우야..? 

동그란 머리통에 쓰고있던 미키마우스 머리띠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심장을 부여잡고 모로 쓰러져 괴로워하는 네가. 

원우야? 

네가 힘겹게 눈을 떠서 나를 봤다. 살짝 웃더니, 다시 눈이 감겼다. 

원우야!!! 

들고 있던 걸 죄다 놓치고 너의 곁으로 갔다. 너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너의 몸을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반응하지 않았다. 도, 도와주세요. 119 좀 불러주세요. 도와주세요. 빨리요. 신고 좀 해주세요. 원우야. 원우야! 그제서야, 여기 놀이공원인데요..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너는 눈을 감고 꼭..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원우야! 내 목소리 들려? 원우야! 너는 눈을 뜨지 못했다. 




구급차를 타고 함께 병원에 오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네 손만 붙잡고 울먹였다. 구급대원이 묻는 질문에 아무 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평소 지병을 앓고 있냐는 물음에도, 그게 어떤 병인지도, 부모님 연락처같은 것도 전혀 몰랐다. 나는 너에 대해서 잘 아는 게 없었다. 너에 대해서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격리실로 옮겨진 너를 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너의 핸드폰을 뒤져서 겨우 연락이 닿은 너의 어머니가 도착할 때까지. 파리해진 얼굴로 원우를 들여다보던 너의 어머니는 가만히 굳은 채 서 있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네가 민규구나. 라며 인사를 건넸다. 

원우가 얼마 남지 않은 건 알고 있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 못했구나... 처음 친구 생겼다고 정말 기뻐하더니. 차마 말 못 했나보네. 

어머니가 손수건에 눈가를 콕콕 찍으며 말을 이었다. 

원우가... 민규를 많이 좋아했어. 착하고, 정도 많고, 생각도 깊은 친구라고.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원우가 병원 생활하느라 친구를 깊게 못 사귀어서 그런지 학교 다녀오면 온통 민규 얘기 뿐이더라구. 민규랑 오래오래 잘 지내고 싶어서 더 살고 싶다고 했는데... 사실, 마지막으로 한 수술이 잘 안 됐어. 스무살까지만 살자. 스무살까지만 버티자. 이 생각으로 원우도, 나도 그렇게 견뎌온 건데..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스무살인데... 그 병이 원우한테 너무 가혹하네. 
원우, 열 여덟 살 아니에요? 
아.. 친구한테 이것도 말 안 했구나. 원우, 학교를 오래 못 다녀서 일 년 휴학했어. 열 아홉이야. 

나는... 너에 대해서 정말 많이 모르고 있구나. 




네가 격리실에 들어가고도 한참동안 너를 만나지 못했다. 간간히 마주치는 너의 어머니에게서 전해들은 바로는 얼마 전 겨우 눈을 떴고, 어머니를 보자마자 나에 대해서 물었으며, 이제 끝이냐 물었다 했다. 희망 한 톨 없는 질문에 나는 네가 가엾어서 울었다. 불투명한 커튼 사이로 호스를 잔뜩 달고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는 너를 몰래 바라보며 가까워진 너의 죽음을 느꼈다. 




나를 잔뜩 짓누르는 죄책감에 너의 병원도 찾지 않았다. 너의 마지막에 내가 있음이 무거워서였다. 나 때문일까. 내가 괜히 아픈 애랑 외출해서. 놀이기구를 타는 걸 말리지 않아서. 네가 고백하는 걸... 피해서. 네가 아픈 줄을 몰라서. 하루하루 늘어가는 링거 줄을 세어보다가 지쳐서 포기한 후로 너를 볼 자신이 없었다. 네가 다시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는 말을 전해듣고서 더욱 그랬다. 한참을 발길을 끊은 나에게 너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면회를 권유했다. 원우가 많이 보고 싶어 해. 언제 또 의식 놓을 지 모르구. 한 번 와줄래? 마지막으로. 




안내문을 따라 손을 씻고, 멸균복을 입고, 소독을 하고, 무거운 문 몇 개를 지나고서야 너를 만날 수 있었다. 머뭇거리며 다가서는 나를 고개를 겨우 돌려서 본 네가 산소 마스크를 쓴 채 희미하게 웃었다. 

왔네. 못 보고 가는 줄 알았어. 
...어디 가? 

뻔히 알면서 묻는다. 

응. 여행. 
어디로? 
멀리. 아주 멀리 가. 
얼마나 있다 오는데? 
글쎄... 언제 올 지 모르겠다. 거기가 좋으면 아주 안 올 수도 있고. 

담담하게 거짓말을 한다. 이렇게 주렁주렁 매달고, 안색도 안 좋은데 어딜. 

민규야. 
응?
미안해하지마. 
...뭘.
네 탓 아니야. 
....
그냥 내가 이만큼인 거야. 나한테 허락된 시간이 여기까지야. 

목이 타는지 켁켁거리며 기침을 한참 한 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 마지막에 너를 섞이게 해서 미안해.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목이 메인다. 눈가가 뜨겁다. 죽음을 기다리는 열 아홉살 짜리의 목소리가 너무 차분하고 덤덤해서 마음이 아린다. 너는 얼마나 오랫동안 끝을 바라봤던 걸까. 얼마 남지 않은 생을 헤아리며 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왜 나만 이럴까 억울하진 않았을까. 

나는 괜찮아. 민규야. 나는 이제 그냥 후련해. 너한테 하고 싶은 말도 다 했고, 네 얼굴도 봤고. 난 괜찮아. 그리고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벽에 달린 부저에서 삑삑- 소리가 났다. 면회 시간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 움직임을 눈으로 쫓는다. 내가 문가로 다가서자 손을 흔들고 싶은지 손끝이 까딱이다가 만다. 문이 쾅, 닫히고 너는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나는 끝내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이틀 뒤 새벽. 너의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원우갔어. 지치고 지친 네 글자였다. 




뭘 입었는지, 뭘 어떻게 하고 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 없이 병원에 도착했다.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일잔실로 내려온 지 하루만이라고 했다. 지쳐 울지도 못하고 벽에 기대어 있는 너의 어머니를 토닥이고 너의 앞에 섰다. 너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네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마지막이었다. 편안하기 만을 바랐던 끝이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움으로 짐작할 수 있는 그의 죽음 앞에, 옅은 미소가 걸린 그 앞에 서서 말했다. 
그동안 애썼고, 고마웠고, 미안했고. 잘 살았다. 정말로. 
그렇게 안녕이었다. 







해 아래 잘 서지 않아서 늘 뽀얗고 말간 피부에 새카만 눈동자. 긴 팔 다리와 가느다란 몸선. 웃을 때 콧잔등에 지던 주름. 얇은 손목. 아직도 너를 그려내라면 단 번에 그려낼 수 있다. 너는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너를 보면, 원우야. 여기가 간질거렸어. 자꾸 가려워서 몰래 몰래 긁었어. 네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너는 그렇지 않을까봐. 네가 그렇게 가고 나서도 나는 너를 생각하면 여기가 간지러워. 가렵기도 하고, 어떨 땐 따끔하기도 해. 이게 뭘까, 원우야. 왜 이런 걸까. 나도 아픈 걸까? 




의문이 든다. 
너를 기다리던 그 날의 나는, 
너를 생각하며 가슴이 간지럽던 그 때의 나는, 
너와 잡은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던 나는, 
두근거렸던 나는. 
너를 사랑했던 걸까? 
사랑이었던가. 
아.
아마, 사랑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