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빈하] 홀리다
2021. 1. 11. 23:41

 

 

 

 

 

 

 

 

 

“나리께오서는 어찌 그리 늘 무서운 얼굴을 하시어요?”

 

 

 

 

 

 

 

 

 

늘 밝은 아이였다. 어릴 적 저잣거리를 떠돌며 힘들게 살았을 삶임에도 그 아이는 늘 웃었다. 티 없이 맑은 미소였다. 내가 그 아이의 곁에 있어도 되는 것인지 나의 존재가 이 아이를 해칠 일을 없는지. 나의 존재까지 의심할 정도로 그 아인 나와 상반되는 아이였다.

 

 

 

첫 만남은 저잣거리에서 이루어졌다. 글을 쓰던 붓이 다 닳아 새 붓이나 살 것으로 나온 저잣거리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 곧 새로운 달을 맞이하는 축제가 열릴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들은 것도 같다. 그에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붓을 사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 어! 자, 잠시 앞에 비키십시오!”

 

 

 

 

 

 

 

 

 

불이 나게 달려오는 한 사내아이와 부딪혀 새로 산 붓이 망가졌다. 그와 동시에 내 위로 쓰러진 아이 뒤로 덩치 큰 사내들이 멈추어 섰다. 둘 중 하나의 일이다. 이 아이가 물건을 훔쳤거나, 이 아이의 부모가 수많은 엽전을 빌리고는 갚지 않았다거나. 대충 덩치 큰 사내들이 하는 것을 보니 전자에 해당하는 일인 듯했다.

 

 

 

거, 아이가 배가 고파 그런 것 같아 내가 대신 돈을 내리다, 허니 그쯤 하고 돌아가시게. 덩치 큰 사내들은 음식 값에 더한 돈을 받고서야 아이에게서 등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나리.”

 

“배가 고프면 돈을 내야하는 것이고, 돈이 없으면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데 어찌 훔칠 생각을 했더냐.”

 

“ㅅ, 송구합니다!”

 

“사과는 내게 할 것이 아니라 음식의 주인에게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선의라고 생각했다. 그저 불쌍한 아이 하나 구원해주었다고 그리 생각했다. 그로 인해 나의 앞길이 이리도 힘들어질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월하노인의 농간질이라 믿고 싶었다.

 

 

 

아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내게 찾아왔다. 내가 사는 곳은 어찌 또 알았는지 사람 좋은 웃음을 하고는 나를 불렀다. 나리, 잠시만 나와 보세요. 귀찮은 몸을 이끌고 나간 곳엔 녀석은 조그만 붓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일전에 제가 나리의 붓을 망가뜨렸지 않습니까, 해서 제가 드리는 겁니다. 내가 그 붓을 건네어 받자 아이는 파드득 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이번엔 훔친 것이 아닙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솔도 엉망, 나무의 질도 엉망, 모든 것이 조화롭지 못한 붓이었다.

 

 

 

 

 

 

 

 

 

“직접 만든 것이냐.”

 

“예, 근데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매일 잡는 것이 붓인데, 그것 하나 모르겠느냐?”

 

“와, 나리 대단하시어요!”

 

“그리고 여기 내 한 번도 보지 못 한 이름이 쓰여 있지 않느냐.”

 

“그것은 소인이 이름이옵니다!”

 

“민규라, 씩씩한 이름이구나.”

 

 

 

 

 

 

 

 

 

아마도 그 이후로 그 아이의 이름은 내 입에서 떨어질 일이 없었다. “민규야, 게 숨어있으면 모를 성 싶으냐.”, “민규야, 어찌 그리 경거망동 하는 것이야!”, “민규야, 잠시 이리 와보거라.” 서서히 그 아이는 나의 삶으로 물들고 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사람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소리가 점점 공간을 채웠다. 조금은 허약한 창 사이로 아침 해가 수줍게 인사를 건네었고, 어느 집인지 달콤한 감자 향이 코를 찔렀다. 익숙하게 젖은 천으로 얼굴을 닦았다. 찬 수건이겠거니 했지만 미지근한 온도였다. 다시 익숙하게 붓을 잡았다.

 

 

 

오늘은 왜인지 바깥이 조용했다. 자연스레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고, 그 부름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는데, 어느 샌가 그 당연한 것을 잊고 있었다. 굉장히 길고도 긴 시간을 홀로 보내었는데, 사람 냄새와 함께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람 없는 시간이 이리도 외로운 것일까.

 

 

 

그러고 보니 자신은 옛 벗과 한 약조가 있었다.

 

 

 

‘내가 죽어도 너는 살아 있을 것이지?’

 

‘아마도 그러하겠지.’

 

‘그럼 약조 하나 하지.’

 

‘무어를?’

 

‘혹시나 언젠가 새로운 벗이 생긴다면 꼭 온 마음을 다해서 품어주게.’

 

‘어찌 그런 말을 해?’

 

‘너는 모르겠지, 네가 우리와 다른 존재라는 이유로 우리와 조금씩 거리를 두는 것을.’

 

‘나는 그런 적이 없!’

 

‘약조하는 것이지?’

 

‘......응.’

 

 

 

왜 갑자기 옛 약조가 떠오른 것일까. 그저 외로움 속에서 바라본 추억거리인가? 아니었다. 태평하게 무언가를 추억할만한 때는 아니었다. 보고 싶은 걸까, 네놈이. 어째 네게서 익숙한 향기가 나는 것도 같았다.

 

 

 

오랜만이었다. 공기를 거칠게 들이마셨다. 인간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너무나도 길어 좀처럼 필요가 없어 썩히고 있던 후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 아이의 채취는 없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다. 늘 쓰던 일지에 쓸 것이 없을 정도로.

 

 

 

외로운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다. 늘 등잔빛 하나에 의지해 낮이고 밤이고 글을 썼고, 붓이 헤지면 붓을 사러 저잣거리로 나섰다. 하나 새로이 생긴 버릇이 있다면 이제는 주변을 둘러본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난 만큼 다시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을까봐. 그리고 가끔 집에 있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혹여라도 그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늘 큰 실망감을 안겨다 주었다.

 

 

 

참 웃기는 일이었다. 인간을 좋아하면 얼마나 좋아했다고 이리도 한 인간을 그리워하는지 같은 종족들이 들으면 까무러지게 놀랄 일이었다.

 

 

 

 

 

 

 

 

 

“달은 매일 뜨는 데 어찌 너는 돌아오지 않는구나. 야속한 놈.”

 

 

 

 

 

 

 

 

 

달은 수도 없이 산 고개를 넘어갔다. 붓을 다섯 번째 바꾸는 날에도 그 아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속절없는 기다림만 쌓여갔다.

 

 

 

비가 왔다. 처마를 따라 떨어진 물방울은 하염없이 땅을 향해 떨어졌다. 마치 하늘이 우는 듯했다. 사실 내가 울고 있는 것일지도.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달랐다. 보이지 않을수록 보고 싶었다. 너는 분명 사람을 그리워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보고 싶구나, 민규야.”

 

“소인이 그리도 보고 싶으셨습니까?”

 

 

 

 

 

 

 

 

 

하늘에서 내리던 비가 멈추었다, 불던 바람도 멈추었다,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익숙한 박자감, 익숙한 목소리였다. 달랑 나흘밖에 듣지 못 했던 목소리임에도 똑똑히 기억했다. 이 목소리는 그 아이의 목소리였다.

 

 

 

옆을 보기가 무서웠다. 혹여나 그 아이가 아니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었다. 너는 참 나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았구나, 이런 것에도 겁을 먹다니.

 

 

 

 

 

 

 

 

 

“나리, 소인이 너무 오래 걸렸지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점점 너의 모습이 보였다. 주책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 눈물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던 넌 무례를 용서하라며 나를 품에 안았다. 분명 나보다 덩치가 작았던 아이였는데 어느 새 큰 것인지 녀석의 품은 생각보다 넓었다.

 

 

 

뭐하다 이제 온 것이냐. 물기 서린 말이었다. 나리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이리 늦었습니다. 따스한 말이었다. 그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 무심한 목소리였다. 같아지지는 못 하여도 비슷한 사람이고자 했습니다. 포근한 말이었다.

 

 

 

같아지지는 못 하여도 비슷해지고 싶다. 무슨 의미일까.

 

 

 

 

 

 

 

 

 

“나리가 인간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ㅇ, 어찌?”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랜 벗 중에 인간이 아닌 자가 있다고.”

 

“뭐?”

 

“늘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나리께서 인간을 멀리한다고.”

 

 

 

 

 

 

 

 

 

그래서 익숙한 냄새가 난 것일까.

 

 

 

 

 

 

 

 

 

“제게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이십니다. 나리의 진정한 벗이 되라고.”

 

 

 

 

 

 

 

 

 

너의 품에서 벗어났다.

 

 

 

 

 

 

 

 

 

“벗이 되고자 했다면서 어찌 그리 사라졌단 말이냐!”

 

“다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어이기에, 이리도, 이리도…….”

 

 

 

 

 

 

 

 

 

나를 애타게 하냔 말이다.

 

 

 

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여린 살들이 맞닿아 나는 마찰음에 나는 절로 얼굴을 붉혔다.

 

 

 

 

 

 

 

 

 

“ㅈ, 지금 뭐…….”

 

“이제는 벗이 될 수 없습니다, 나리와 전.”

 

 

 

 

 

 

 

 

 

나리를 사모합니다.

 

 

 

 

 

 

 

 

 

*

 

 

 

 

 

 

 

 

 

그 말 한 마디에 내 안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이 무어인지 느낄 새도 없었다. 그저 본능이 말해주는 대로 네게 달려들었다. 전의 연한 마찰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 진한 마찰을 이루어내었을 뿐이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여전히 마찰은 이어지고 있었다. 괜찮겠느냐, 나의 정체를 안다고 하지 않았어. 거친 숨을 겨우 몰아쉬며 뱉은 말이었다. 소인에게만 집중하세요. 급하게 나의 옷고름을 풀었다. 정말 홀리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너의 큼지막한 손이 더듬는 손길이 색정적이었다. 벌써부터 이래도 되는 것이냐?

 

 

 

 

 

 

 

 

 

“무엇이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걸치고 있던 천이 모두 바닥으로 떨어지고 너는 등잔의 불을 불어 껐다.

 

 

 

 

 

 

 

 

 

“어쩌면 네놈이 나를 홀린 것일지도 모르겠구나.”